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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박헌영(朴憲永)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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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朴憲永)
[1900 ~ 1955] 공산주의 운동가. 본관은 영해 . 충청 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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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朴憲永) 1947년 김일성 여운형 안재홍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선건국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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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 1955] 공산주의 운동가. 본관은 영해 . 충청 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문 공부를 하다가 12세 되던 해에 예산군 대흥면의 대흥 보통 학교 에 입학하여 3년 후인 1915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에 지금의 경기 고등 학교인 경성 고등 보통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당시의 YMCA인 조선 중앙 기독 청년회 영어반에 들어 영어를 열심히 익혔다. 1919년에 경성 고등 보통 학교를 졸업한 뒤에 영어 공부를 계속하면서 미국 유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중국의 상하이로 건너가, 거기서도 조선 중앙 기독 청년회 부설 강습소를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무렵에 임원근·김단야· 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이 이끄는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주의 선전문을 번역하는 일에 힘썼으며, 고려 공산당 청년 동맹의 책임 비서가 되었다. 1921년에 허정숙의 소개로 뒤에 그의 아내가 된 주세죽을 만났다.
 
1922년 1월에 모스크바 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자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국내에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년 6개월간 복역한 뒤 출감하여 1924년 2월에 결성된 신흥 청년 동맹에 가입하였다. 이 때 박헌영은 전국 28개 도시 를 돌면서 식민지의 청년 운동을 북돋우는 강연을 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동아 일보》 기자로 입사하였으며, 당시의 국내 청년 단체가 통합하여 새로이 조직된 조선 청년 총동맹에 한신교·주종건 등과 함께 중앙 검사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해 9월에 《조선 일보》 기자로 자리를 옮겼으나 사설 문제와 관련하여 10월 중순에 해직되었다.
 
1925년에 박헌영 이 속해 있던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조선 공산당 창당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마침내 국내에서 공산당 조직이 창설되었다. 같은 해 4월 18일에 고려 공산 청년회를 조직하여 책임 비서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펴다가, 11월 30일에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아내 주세죽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구속되었다. 그러나 재판을 받던 중에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1927년 11월에 병 보석으로 풀려난 뒤, 다음 해 11월에 국내를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로 가서 그 곳의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9년 6월에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하였다.
 
1932년에는 다시 상하이로 가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코뮤니티》라는 기관지를 만들어 국내에 배포하다가 다음 해 7월에 상해의 일본 영사관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감옥 에서 복역하였다. 1939년에 감옥에서 나와 김삼룡·정태식 등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성 콤그룹'은 농민· 노동자·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중 조직의 건설과 조선 공산당 재건을 목적으로 결성되어 경성과 함경도·경상도 등의 각 지방 조직과 손을 잡고 조직적인 활동을 폈다. 이 그룹은 계급· 종교·정파에 관계 없이 일제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모아서 인민 정부 를 세우고, 결정적인 시기에 도시 폭동 전술로 일제를 무너뜨린다는 기본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검거 선풍으로 결국 공산당 재건을 이루지 못하였고, 박헌영은 전라 남도 광주로 피신하여 한 벽돌 공장에 가명으로 취직해서 노동자 신분으로 은신 생활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8월 19일에 서울에 올라온 박헌영은 공산당 재건에 힘써 장안파와 재건파를 통합, 조선 공산당의 중앙 기구를 구성하여 책임 비서가 되었다. 또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이 무렵 박헌영은 농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양심적인 지주와 자본가들과도 연합한 혁명 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각 정당과 사회 단체를 연합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결성하자, 박헌영도 1945년 10월 23일에 조선 공산당을 이끌고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 탈퇴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자, 그는 조선 공산당의 찬탁으로 노선을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 지지 등 공산주의 활동을 지휘하다가, 1946년 9월부터 미군정의 지명 수배를 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48년 9월 남조선 노동당 당수로서 북한의 내각 부총리 겸 외무 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4월 남·북 노동당이 합쳐 조선 노동당을 세우자,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 후 군사 위원회 위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직위에 있었으나 1953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계 숙청 작업으로 8월 3일 체포되었다. 그 후 평안 북도 철산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 분자· 간첩 방조 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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