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경상 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세운 사당.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사적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면적 약 3,450㎡이며, 내부 구조는 사당 건물과 비각·비각문·재실·내삼문·외삼문· 강당 등과 부속 건물, 비(碑) 4기, 가분묘 1기 등이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한산도에서 왜군들이 몰고 온 적선 70여 척을 무찔러 크게 승리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정헌 대부에 올랐다. 또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로 있을 때에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제작하는 등, 군사 시설을 확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정탁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고, 그 후 왜군들과 싸우던 중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 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시신은 지금의 충렬사에 있는 묘지에 안치되었으나, 당시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살아 있을 때 세운 공적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며, 그가 순국한 지 35년 뒤인 1633년(인조 11)에 이 곳 선비들이 그를 기리며 무덤 주위에 비를 세우고, 제사를 올릴 작은 초가를 짓게 되었다. 1658년(효종 9)에는 초가를 헐어 버리고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셨으며,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662년(현종 3)에는 현종이 직접 '충렬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이 곳 선비들에게는 충렬사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다짐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사당은 1661년(현종 2)과 1899년(광무 5)에 개축 또는 중수되었는데, 1661년의 공사 때에는 그 이유를 자세히 기록한 송시열의 비문을 세워 지금까지도 그것이 남아 있다.
처음에 사당을 세웠을 당시에는 사당 바로 옆에 '호충암'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며, 그 곳에서 화방사의 승려 10여 명과 승장 1명이 서로 돌아가며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현재 이순신 장군의 묘는 충남 아산의 현충사로 옮겨진 상태이며, 원래 묘가 있었던 자리에는 봉분만 남아 있어 가묘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73년 사적 233호로 지정되면서 내부의 건물 들을 보수·정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