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3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무장 봉기로 차르의 제정(帝政)이 붕괴된 러시아의 혁명으로 20세기 초 러시아에는 세 번에 걸쳐 혁명이 일어났다.
그 처음은 1905년에 '피의 일요일'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일어나 수도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한 제1차 러시아 혁명 이 있었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고 있던 1917년에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3월 혁명으로는 러시아 황제 차르 제정이 붕괴되었고, 11월에 일어난 혁명으로는 볼셰비키 정권이 세워졌다. 3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러시아력으로는 2월이었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2월 혁명'이라고 하며, '2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3월 혁명과 같은 해에 일어난 11월 혁명은 러시아력으로 10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10월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한다.
1905년에 일어났던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전제 정치를 민주 공화정으로 바꾸는 데 실패한 뒤, 차르 제정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 것은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부터였다. 1914년 러시아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뒤로 러시아의 군장비와 경제력의 한계가 드러나 로마노프 왕가의 몰락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세계 대전 중 차르의 계속된 동원령과 가축의 징발로 러시아의 농업은 황폐할 대로 황폐하였다. 그리고 군수 공업에만 치중한 탓으로 국민 생활에 긴요한 생필품 생산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 도시의 식량· 연료 사정의 악화는 대도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1,330건의 파업이 발생하였고, 2월 중순부터 식량 부족으로 공급이 어려워지자 수도 지구 사령관은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에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식량의 부족으로 배급제마저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곧, 3월 8일 영하 20℃의 추위에 굶주린 시민들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하여 길게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던 배급 대신 시민들에게는 식량이 바닥이 나 배급을 계속할 수 없다는 말이 전해졌다. 배급을 기다리던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들어갔다. 이 때의 시민 봉기에는 많은 수도 경비대들도 참가하였다. 시위를 진압시켜야 할 군부마저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마침내 니콜라이 2세는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왕위를 넘기고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미하일 대공이 왕위 승계를 거부함으로써 3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러시아 의 로마노프 왕조는 그 종막을 고하였다. 우리 나라의 국회와 같은 두마 위원회는 차르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 정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시위군 쪽에서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였다. 소비에트 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와 외곽 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3월 혁명으로 러시아에는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에 의한 소비에트가 탄생하는 한편, 임시 정부가 성립되어 2중 정권이 존속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러시아 정부로서의 임시 정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월 14일 소비에트는 자기들이 실질적으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정부임을 선포하는 대신, 군대에 임시 정부의 명령이 아닌 오로지 소비에트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을 지시한 '명령 제1호'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임시 정부에는 소비에트에게 그러한 명령을 철회시키거나 제압할 힘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본보기로 삼아 러시아 전국의 도시와 시골, 그리고 군대 에까지 많은 소비에트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임시 정부 보다 훨씬 더 민중 가까이에 있었으며, 민중으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또 신뢰를 얻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러시아에는 볼셰비키 정권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