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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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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
빌어먹고 사는 사람. 이리저리 떠돌며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금품 등을 남에게 얻어서 생활하는 사람. 동냥아치·비렁뱅이·걸뱅이·유걸·걸인이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거지 (-) 도미 부부 설화 설화 향가 백제 무왕 신재효 선화공주 각설이 타령 변강쇠타령 서동요 조신 설화 삼국유사
▣ 백과사전
빌어먹고 사는 사람. 이리저리 떠돌며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금품 등을 남에게 얻어서 생활하는 사람. 동냥아치·비렁뱅이·걸뱅이·유걸·걸인이라고도 한다.
 
거지는 전쟁· 재해· 질병 등을 계기로 생기며 일시적으로 거지 생활을 하고 환경이 나아지면 다시 직업을 갖고 생활인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거나 대를 이은 거지인 경우에는 거지 생활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게 되면서부터 한 장소에 머물러 사는 정착 생활을 해 왔는데, 그 때부터 정착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돌며 지낸 거지가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거지 생활을 반드시 사회에서 따돌림당한 사람들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수행의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거리를 떠돌며 음식을 구걸하고 길에서 잠을 잤던 수도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부끄럽고 고생스러운 거지 생활을 일종의 고행으로 여겼는데, 예를 들어, 불교의 탁발승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경문을 외고 복을 빌어 주고는 돈이나 쌀을 얻었다. 이 밖에도 가난으로 인해 생긴 거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잠깐 동안 거지 노릇을 하는 일도 있었다.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이 거지로 꾸미고 신라에 들어가서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마를 구워 주며 자신이 지은 향가《서동요》를 부르게 한 것이라든가, 조선 후기 헌종 때 우리 나라의 천주교 신도 들이 외국인 신부를 밀입국시키기 위하여 거지로 꾸미고 두만강 국경 지대를 넘나들며 국내 정세를 알려 준 예도 있다.
 
전쟁이나 재해, 그릇된 정치로 인해 유랑인이 된 사람들은 일정한 거주지나 직업을 버리고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큰 사회 문제가 되어 왔다. 이들은 생업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과 산야를 떠돌며 길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거지가 생겨난 것으로 생각되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도미 부부 이야기이다. 백제 개루왕 때, 도미 부인을 좋아하였던 왕의 학대를 못 이겨 고구려 로 도망가서 살게 된 도미 부부가 그 곳 사람들이 옷과 음식을 적선해 주어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는 온 가족을 이끌고 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는 조신의 꿈 이야기를 통해 당시 거지들의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후의 기록에도 거지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고려 성종 때, 유학자인 최승로는 상소문에서 도망간 노비들이 떠돌아다니며 거지가 되거나 거지들이 절로 들어가 중이 되고자 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재주를 넘는 등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그 대가로 구걸을 하는 거지들도 있었다. 예로부터 북방에 살던 거란족 등이 전쟁 등을 이유로 고려로 귀화해 살았는데, 이들이 '백정'이라는 계층을 이루었다. 이들 백정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 과 뚝 떨어진 곳에 자신들만의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도살업이나 광대짓으로 살림을 꾸렸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고려 후기 이후 '재인'이 되어 재주를 넘고 걸쭉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악기를 연주해 사람들을 끌어 모은 후 구걸을 하였다.
 
양성지는 《눌재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면서 구걸을 하는 백정들이 사회를 어지럽히니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구걸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재주를 익혀 구걸의 도구로 삼는 거지들이 있었다. 각설이패나 풍각쟁이가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남의 집 앞이나 장터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해 돈과 음식을 얻었다. 역시 노래와 춤을 보여 주면서 탈춤 이나 재주넘기 등의 기술까지 익혔던 사람들로 '초란이'가 있는데, 이들은 궁중에서 벌어지는 의식에까지 불려 간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각설이패는 혼사 등 마을에 행사가 있거나 장이 열리는 날이면《각설이타령》 혹은 《장타령》이라고 하는 노래를 부르며 나타나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음식 등을 얻어 갔는데, 그 모습이 조선 후기 판소리 작가 신재효의 《가루지기타령》에 잘 묘사되어 있다. 재주보다는 나무나 풀뿌리로 만든 물건 등을 지고 다니며 밥을 얻어먹던 솔장수패·솟대잡이패·쳉이장수패·용천뱅이·문둥이패 등도 거지와 다름없는 계층이었다. 거지들의 비참한 생활은 조선 중기부터 문학 작품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광해군 때 흉년으로 집을 떠나 떠돌던 거지 떼의 참상을 조위한이 가사《유민탄》으로 읊었고, 연암 박지원은 거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광문자전》을 쓰기도 하였다. 거지들은 수십 명, 수백 명씩 무리를 지어 구걸을 하다가, 나중에 이마저도 어려워지면 도적이나 다름없는 '모두먹기패'가 되어 식량 이 남아 있는 이웃 마을에 몰려들어가 그 고을의 식량을 다 먹어 버린다. 그러면 '모두먹기패'에게 식량을 뺏긴 이웃 마을의 백성도 함께 거지가 되어 또 다른 이웃 고을로 '모두먹기패'가 되어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의 정착민들과 섞여 살지 못하고 제삿집이나 혼사 마당으로 떠도는 거지들은 결국 다리 밑이나 상여 집에서 얼어 죽거나 병들어 아무도 모르게 죽어 가는 수가 허다하였다. 이들은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산업 사회가 되어가면서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졌다.
 
일제 강점기에도 거지 떼가 골칫거리로 등장하였는데, 거지들에 대한 보호가 전혀 없던 이 때에 구세군·외국인 선교사· 불교 단체 등이 앞장서 구호 사업을 펴기도 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6·25 전쟁을 치르면서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들로 이루어진 거지 떼가 크게 늘었으며, 전쟁 중 부상으로 팔·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나병 환자들이나 맹인 등 장애를 가지고 있는 거지들은 자신들의 장애 부위를 일부러 드러내고 과장해 구걸의 수단으로 삼았다.
 
지금은 전쟁으로 인해 거지가 된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노인들, 정신 박약자 등이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거지로 떠도는 예가 늘고 있다. 구걸을 하는 방법도 거리나 지하철 역 등지에 동냥 그릇 하나를 놓고 앉아 적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행 중인 지하철 안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러 동냥을 하는 맹인들도 있고,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하는 글과 함께 값싼 물건을 내놓고 몇 배나 되는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갈수록 메말라 가는 사회 속에서 일부 탈선 청소년들이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구걸을 하는 경우나, 깡패들이 불구자에게 조직적으로 구걸을 시키는 현장이 텔레비전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이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거지 근/현대 소설 김동인 (16) 거러지 이상화 (0)
◈ 조회순
2024.08.31
13. 벼락부자가 된 거지
【문화】 옛날 거지 하나가 어느 산 너머 고개를 넘어가는데 노인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저마다 거지를 보며 말했다.
첫째 노인이, “저 거지는 오늘 저녁 천 석을 얻겠네”하자, 둘째 노인이, “내가 보기엔 오늘 천 석을 얻었으니 내일 저녁이면 만석을 얻을 걸세”그 이야기를 들은 거지가 노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2024.09.25
【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2024.10.21
【문화】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그 부자는 방을 써 붙이고는 양자될 아이를 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년들이 그 방을 보고 부자를 찾아와 양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부자는 찾아온 소년들이 자기의 물건을 탐내는 욕심쟁이인가 아닌가를 먼저 시험해 보았다. 즉, 소년들이 찾아오면, 부자는 그들을 자기 방에다 들여 놓고 얼마 동안 혼자 있게 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 최근등록순
2024.10.21
【문화】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그 부자는 방을 써 붙이고는 양자될 아이를 구하고 있었다.
많은 소년들이 그 방을 보고 부자를 찾아와 양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그런데 부자는 찾아온 소년들이 자기의 물건을 탐내는 욕심쟁이인가 아닌가를 먼저 시험해 보았다. 즉, 소년들이 찾아오면, 부자는 그들을 자기 방에다 들여 놓고 얼마 동안 혼자 있게 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2024.09.25
【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2024.08.31
13. 벼락부자가 된 거지
【문화】 옛날 거지 하나가 어느 산 너머 고개를 넘어가는데 노인 세 사람이 지나가면서 저마다 거지를 보며 말했다.
첫째 노인이, “저 거지는 오늘 저녁 천 석을 얻겠네”하자, 둘째 노인이, “내가 보기엔 오늘 천 석을 얻었으니 내일 저녁이면 만석을 얻을 걸세”그 이야기를 들은 거지가 노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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