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 전쟁(1861~1865) 때 벌어진 가장 맹렬한 전투. 펜실베이니아주 남부 애덤스군에 위치한 게티즈버그에서 1863년 7월 1일부터 3일까지, 3일 동안에 걸쳐 벌어졌으며, 북군이 이 전투에서 이겨 남북 전쟁의 마지막 방향이 결정되었을 만큼 중요한 전투였다.
1863년 5월에 버지니아주의 챈슬러즈빌에서 북부 연합군 을 크게 이긴 뒤 북군의 사기를 꺾고, 유럽 국가들로부터 남부 연합을 승인받고자 했던 남부 연합군의 로버트 리 장군은 북부로 진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때 그의 군사는 7만 5,000명에 달하였다. 리 장군은 전체 군대를 3 군단 으로 나누어 출동시켰다. 북군은 조지 미드 장군의 지휘 아래 전투의 요지인 게티즈버그 언덕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된 첫날에는 맹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북군과 남군 양쪽 모두 사망자와 부상자가 많이 생겼다. 이 때 양쪽 사령관들은 똑같이 어떻게 해서든지 게티즈버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일째에는 세미테리 언덕, 휘트필드, 피치오처드 같은 곳을 차지하기 위한 결사적인 공격과 반격이 수없이 계속되어 양쪽 모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었다. 3일째에는 리 장군이 결단을 내렸다. 남부 연합군 1만 5,000명 가량은 1만 명 가량의 북군이 지키는 세미테리 언덕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북군의 거센 저항을 뚫고 남군 선발대가 언덕까지 진격하였으나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다. 남군은 공격하는 동안 포탄을 맞아 큰 타격을 입고 군대의 대열이 흐트러졌으며, 지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3면에서 맹렬한 공격을 받아 19개의 전투 깃발 과 수백 명의 포로를 남긴 채 후퇴하였다.
7월 4일에 리 장군은 공격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북군은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 날 밤 그는 세찬 비가 내리는 것을 이용해 버지니아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리 장군 이 이 전투에서 진 이유는 그가 남군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것과 미리 적의 정세를 살피는 것에 실패한 점 따위를 들 수 있다. 미드 장군은 비록 남군을 끝까지 쫓아가 쳐부수지는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남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3일 동안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때에 입은 손해는 남북 전쟁 가운데 가장 커서 북군은 8만 8,000명 가운데 사망자와 부상자가 2만 3,000명 가량이었고, 남군은 7만 5,000명 가운데 2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었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이 전투가 있은 지 4개월 뒤인 1863년 11월에 있었다. 이 때 이 전투지는 국립 묘지 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