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중세의 통일 왕조. 왕건이 후삼국 의 분열을 수습하여 세운 나라이다.
918년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뒤로부터
1392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기까지 34대 475년간 계속된 왕조이다.
건국과 발전
태조 왕건은 본래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태봉(
후고구려)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궁예를 몰아 내고 왕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18년).
건국 후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는 통일 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호족 세력을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흡수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초기에는 호족 세력이 강성하여 왕권이 위협당하기도 했으나,
광종 때에 이르러 신구 세력의 교체를 통해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
성종은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문종 때에는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뒤 밖으로 여진의 압력을 받은데다가 안으로 사회 모순이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의 난 같은 내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내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약을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권문 세가의 방해로 실패하고, 그 동안 지방에서 성장해 온 중소 지주층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과 연합하여 권문 세가의 세력을 꺾어 새 왕조 조선을 열게 되었다(1392년).
정치 제도
초기에는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아울러 사용하고, 당나라의 관제도 일부 모방하여 실시하다가 성종 때
최승로의 건의로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받아들여 크게 정비하였으며, 문종 때에는 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중앙 관제
성종 때 국가 정책을 작성하고 심의하는
중서 문하성과
상서성을 두고, 상서성 아래에 6부를 두어 각기 행정을 맡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왕명의 전달이나 군사 기밀, 왕궁의 호위를 맡은 중추원과 돈, 곡식의 출납을 맡는 삼사, 감찰 기관인 어사대 등을 설치하였다.
국가 회의 기관으로는
도병마사가 있어 국가 정책을 협의하였으며, 또 왕권을 견제하는 서경이나 간쟁 제도도 마련하였다.
지방 조직
처음에는 호족들의 자치에 맡겼으나, 성종 때 12목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면서부터 정비되어 후에는 5도 양계로 나누었다.
도에는 안찰사를 파견하였고, 그 아래 주, 부, 군, 현을 두는 한편 향·소·부곡이라는 천민 집단의 특수 행정 구역도 두었다.
양계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동, 서의 국경 지대에 두고 병마사를 두어 다스렸는데, 그 아래에는 대부분 진을 배치하였다.
군사 조직은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군 으로 편성되었다. 2군은 왕실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6위는 수도 방위를 맡고, 지방군은 지방에서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잡역을 하였다.
그 밖에 특수 부대로 별무반이나 삼별초 등이 필요에 따라 설치되었다.
교육·과거 제도
성종 때에 이르러 일종의 국립 대학인
국자감이 개경에 세워지고, 인종 때에 지방 학교로
향학을 설치하였다.
국자감에는 경사 6학이 설치되어 신분에 따라 교육하였다. 그 당시의 교육은 관리를 양성하는 데 큰 비중을 두어 과거 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광종 때 처음 실시된 과거 제도는 귀족 관료 시험인 제술과와 명경과, 기술 시험인 잡과, 승려들을 위한 승과 등이 있었다.
토지 제도
토지 제도는
경종 때에 마련된
전시과를 토대로 정비되었다. 전시과는 관리들의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와 임야를 주는 제도로, 본인이 죽으면 나라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토지를 분배받은 관리는 농민들에게 농사짓게 하여 조세를 받았는데, 공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수확량의 4분의 1을, 사전을 경작하는 농민은 2분의 1을 조세로 바쳐야만 했다.
사회·경제
고려는 평민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가족 단위로 조세를 부과함으로써 사회 운영을 편리하게 하였으며, 가문이나 문벌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문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귀족으로서의 관직, 토지와 함께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귀족들은 문벌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좋은 문벌이나 왕실과 혼인 을 하여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귀족 문벌 사회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점차 보수화하여 그 모순이 드러나더니, 무신의 난이 일어나 귀족 중심 제도가 무너지고, 그 이후에는 문벌보다 실력을 중요시하려는 풍조가 생기게 되었다.
농업을 중요시한 고려에서는 농민 경제와 민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의창, 상평창 등의 구제 기관을 두고, 빈민 치료를 위한 대비원을 설치하였으며, 귀족들의 고리 대금업이 성하여 그것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한 보(寶)가 성행하였다.
민중 생활에서는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봄철의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겨울철에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팔관회가 대표적인 행사였고, 5월 단오와 6월 유두, 7월 백중날, 8월 한가위 를 큰 명절로 즐겼다.
상업은 크게 발달하지 못해 물물 교환의 단계에 머물고, 화폐도 주조되었으나 널리 사용되지 못하였다.
법률은 당률을 본뜬 71조의 법률과 보조 법률 이 있었으나, 일상 생활에 관계되는 것은 대개 전통적인 관습법에 따랐다.
문화
고려 시대에는 호족들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함에 따라 지방과 중앙의 문화가 교류되고 문화의 폭이 넓어졌다.
또한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융합되면서 대장경의 간행이나 실록 편찬, 개인 문집의 출판 등 기록에 의한 문화 활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예술 활동에 있어서는 불교 미술이 여전히 성하였으나, 석탑, 석등, 불상 등의 조각 분야는 진보가 없었고, 주로 귀족들의 생활 기구를 중심으로 한 공예품 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불교
불교는 태조가 장려한 이래 과거에 승과가 마련되고, 국사·왕사 제도가 설치되는 등 국가의 정신적 지도 이념 으로 크게 숭앙되었다.
전기에는
의천이 개창한천태종이성하였으나, 무신의 난 이후에는 무신 정권의 지원을 받은 조계종이 일어나 널리 퍼지게 되었다.
불교의 융성에 따라 대장경의 조판이 거듭되었는데, 초기의 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고, 고종 때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간행한
팔만대장경판이 합천 해인사에 보존되어 전한다.
유학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원리로 존중되어 과거 제도의 시행과 함께 크게 발달하였다. 문종 때에는 그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그 때에는 관학보다도 최충 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세운 사학이 더 발달하였다. 예종 때에 이르러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한 양현고라는 장학 기금이 설치되고, 또 국자감에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기도 하였다. 후기에는 원나라로부터 새로 성리학이 들어와 신진 사대부 계층에 널리 퍼짐으로써 조선 왕조 개창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문학
한문학이 중심이었으며, 유학의 발달과 함께 과거에도 문예가 중요시되어 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초기까지는
향가가 유행하였으나 점차 가요가 불려졌으며, 후기에는 정권에서 밀려난 문신 귀족들에 의해
경기체가가 지어졌다. 중기 이후 새로운 문학 형태인
시조가 생겨 조선 시대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미술
건축에는 궁궐, 절 등 훌륭한 것이 많았는데, 그 중 지금 남아 전하는 것으로는 후기에 지어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과 부석사 조사당,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등이 있다.
석탑은 여러 가지 모양의 석탑을 시험하는 단계 로서, 전기의 현화사 7층 석탑과 월정사 8각 9층 석탑, 후기의 경천사 10층 석탑 등이 대표적이며, 불상 은 관촉사 석조 미륵 보살 입상( 은진미륵)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등에서 그 예술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은 일찍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설치하여 화가를 양성하였는데, 전기의 이영과 이광필, 후기의 고유방, 공민왕 등이 뛰어났으며, 글씨는 구양순체와 조맹부체가 유행하여 유신, 탄연, 최우 가 신라의 김생과 더불어 신품 4현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공예
고려 예술을 대표하는 것은 공예였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자기 는 고려인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자기 중 특히 청자는 은근하고 밝은 비취색과 여러 가지 형태의 회화성을 지닌 무늬가 조화되어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데, 그러한 자기 기술은 고려인의 독창적인 것이다.
음악
음악은 우리 나라 고유의
향악이 널리 퍼졌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이 전해져
아악이라는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였다. 춤과 연극도 발달하여
처용무와
산대놀이 같은 가면극이 성행하였다.
인쇄술
목판 인쇄술은 이미 통일 신라 시대부터 발달하였는데, 고려 때에는 더욱 발전되어 세 차례에 걸친 대장경 간행 사업이 완수되었다.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활자의 발명 을 촉진시켜 13세기 초에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 활자 를 만들어 쓰게 되었는데, 1234년(고종 21년)에 벌써 금속 활자로 《
상정고금예문》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책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1377년(우왕 3년)에 찍은 《
직지심경》이 지금 남아 전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으로서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