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남도 공주시 장기면 석장리에 소재한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1964년 5월에 홍수로 무너져 내린 강가에서 발견된 유적 으로 바다 높이보다 14.7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발굴 장소는 육성층(陸成層)으로 빙하기를 거치면서 찰흙층이 어우러진 27개 지질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래층들은 빙하기에 쌓였으며, 간빙기를 거쳐 이룩된 지층은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맨 아래층에서 중석기 문화층까지 12개의 문화층이 발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겉흙층에서 민무늬 토기 조각과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화살촉 등도 발견되었다.
1964년 11월 22일 최초 발굴로부터 거의 10여 년에 걸쳐서 조사·연구된 구석기 유적으로 구석기학의 토대가 된 유적이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유적지에서는 전기 구석기에서 중석기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후기 구석기 집터에서는 당시 사람의 머리털도 발견되었다.
또한 석기 를 이용해 만들어진 돌날·밀개·새기개 등을 비롯하여 기둥을 세워 만든 움막집에서 화덕을 이용하여 불을 피운 흔적도 나타났다. 이러한 유적들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집터는 삶의 터전임이 밝혀졌으며 화덕에서 나온 재를 추정한 결과 2만 8,000년 전의 것으로 당시 한반도에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한 갈래가 밝혀졌다.
석장리 유적은 1, 2 지구 로 나뉘어지는데 1지구의 집터층은 2만 8,000년 전의 유적 이며 그 아래층은 3만 6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2 지구에서는 연대를 추정할 수 없는 여러 층에서 사람이 산 흔적과 외날찍날개·이른주먹도끼 및 돌날석·새기개·좀돌날 등이 쓰였던 층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석장리 석기의 주류는 차돌과 편마암이고, 중기 구석기층은 차돌 반암 ·규장암·유문암이 나타나고 있으며, 후기 구석기층은 흑요석·차돌반암·옥수(玉粹)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중석기층은 수정·규장암·유문암도 더하여 사용되었다. 석기의 모습은 돌감의 성질, 이를테면 돌의 결, 낱알의 굵기, 굳기, 결정체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석기들의 재료는 전기 에는 석장리 산기슭으로부터 얻어서 만들어졌고, 후기에는 보다 더 먼곳에서 흑요석을 운반하여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석장리의 구석기 문화 유적의 발굴 의미는 구석기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와 함께 지층의 형성 과정을 밝혀 주었다는 데 있다. 또한 구석기 유적의 발굴에 전기 를 마련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공주 석장리 유적은 우리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보게 하는 기틀을 마련해 준 모태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