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 ~ 1964] 제헌 의원·노동 운동가. 경상 남도 동래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북한에서 조선 신민당을 이끌었던
김두봉의 사촌 동생이다. 휘문 의숙과 경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김원봉·
이여성 등과 함께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진링〔金陵〕 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여송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1920년
박이규·
박중화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노동 운동 단체인 '
조선 노동 공제회' 상무 간사를 맡았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 대학 사회 학과에 들어갔으며, 무정부주의자
박열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흑도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잘 맞지 않아 따로
북성회를 조직하여 기관지 《척후대》 《대중 시보》 등을 펴내며, 조선 고학생 동우회에도 가담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22년 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계급 투쟁 선언인 '동우회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몰래 서울에 온
정재달과 만난 일로 하여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4년
정백·
김사국·
신백우 등과 함께
조선 노동 총동맹 조직에 참여하였고,
김종범·
이헌 등과 함께 '
북풍회'를 조직하여, 국내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1925년
조동우·
김종범·
신철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 공산당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1926년 체포되어 1931년까지 6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거부하고, 좌익 노선에서 벗어나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한국 민주당 조직 부장의 일을 맡아 보았다. 이 때의 그의 입장에 대하여, 그는 뒷날 "당시의 나는 조선 정치 운동의 현 단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임을 직시한 까닭"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한국 민주당이 좌우 합작 위원회가 추진하려는 토지 정책에 반대하는 등, 지나치게 보수화하자 탈당하였다. 그리고는
김규식을 총재로 한 민중 동맹의 상임 위원직을 맡으면서, 좌우 어느 쪽도 아닌 중간 노선을 취하였다. 1947년에는 나승규 등과의 분규로 민중 동맹을 탈퇴하고,
조선 공화당을 조직하여 그 서기장이 되었다.
1948년
5·10 총선거에는 경상 남도 동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헌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제헌 의회에서 그는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활동 등 젊은 의원들의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국회에서 "남북 평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UN 결의에 의한 한국 내 주둔 외국군의 즉시 철퇴를 UN 한국 위원단에 요청할 것을 결의한다."는 '외군 철퇴 요청 결의안' 상정을 추진하다가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련되어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났으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서대문 형무소에서 나와 북한으로 갔다.
1955년에는 북한의 인민 경제 대학 특설반에 들어갔으며, 1956년 재북 평화 통일 촉진 협의회 상무 위원 겸 집행 위원이 되어 평화 통일 사업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반당· 반혁명 분자로 몰려 평안북도의 외딴 곳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