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9 ~ 17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이며, 아버지는 청송 부사 홍경(洪慶)이다.
166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75년 유생들과 함께 자의 대비가 상복을 몇 년 동안 입느냐 하는 예절상의 문제를 다루는
제2차 예송 문제로
송시열이 유배되었을 때, 이의 부당함을 들어 상소하였다.
168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전적과 지평을 거쳐 1686년 정언이 되었다. 이어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으며, 1689년 홍문록과 도당록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지난날 송시열과 함께 유배된 이상을 두둔한 일이 죄가 되어 철산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다시 기용되어 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이어 수찬·교리·집의 등을 거쳐 1695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96년에는 회양 부사, 1697년에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698년 승지가 되었으며, 1699년 대사간, 1702년 개성 유수, 1703년 이조 참판, 1704년 대사헌에 이어 대사성을 지내고, 1706년 예조 참판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707년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며, 이어 형조 판서· 병조 판서·이조 판서를 지냈다. 1710년에는 호조 판서가 되어 북한구관당상을 겸하였으며, 산성과 행궁 쌓는 일의 책임을 맡았다. 1713년 우참찬· 예조 판서·판의금 부사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으며, 1716년 판중추 부사를, 1721년에는 중추부 영사에 올랐다.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화를 당하여 축출되자,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평생을 청빈하고 곧게 살았으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큰 사람이라는 뜻의 ' 장자',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라는 뜻을 지닌 '완인'이라 불렸다.
문집에 《갑봉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