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5년(영조 31)
윤지 등이 중심이 된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하여 역모를 꾀한 사건. 을해옥사, 또는 윤지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제14대 임금인 선조(재위 1567~1608) 때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여 동인과 대립하였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후, 조선의 제19대 임금인 숙종(재위 1674~1720) 말년에 왕위 계승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하였으며, 제20대 임금인 경종(재위 1720~1724) 때와 제21대 임금인 영조 (재위 1724~1776) 초기에 극도로 대립되었다.
영의정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은 경종이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몸이 쇠약하기 때문에 세제를 책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 이 받아들여져, 뒤에 제21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가 될 연잉군 금이 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 말년에 연잉군이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 처리하게까지 되자, 소론의 김일경(1662~1724) 등은 노론이 역모하였다고 없는 사실을 꾸며 내어 고발하였다. 이 때 노론 4대신을 비롯하여 수백 명의 노론 일파가 죽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경종 원년(1721~1722)부터 경종 2년에 걸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사화를
신임사화라고 하며, 이 후 김일경은 이조 판서 자리에 올랐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노론이 다시 세력을 잡고 김일경 부자를 죽이고 소론 일파를 처형하였다. 이 때 나주 괘서 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의 아버지 훈련 대장 윤취상도 잡혀 가서 고문을 받아 죽었다. 윤지는 1724년에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뒤에 나주로 옮겨져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1727년(영조 3)에 노론의 일부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기회를 엿보던 소론은 1728년 3월에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이인좌가 주동이 되어 청주성을 함락하여 밀풍군 탄을 왕으로 내세웠으며, 영조의 왕위 정통성을 부정하고 임금의 계통을 바르게 한다는 내용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돌렸다. 또한,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반군에 호응하도록 꾀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원로였던 최규서가 조정에 반역 행위를 고발함으로써 반군이 곧 진압되고 소론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돌아온 윤지는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들 나광철, 나주 목사 이하징, 이효식 등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울과 지방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론 들을 모으고, 여러 차례 변란을 겪는 과정에서 벼슬에 오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흡수하여 기반을 다져갔다. 1755년 1월에 윤지는 우선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나주 객사 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붙이고, 푸닥거리를 벌여 민심을 현혹시키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나 거사 전에 나주 객사에 붙인 괘서가 윤지의 짓임이 발각되어 전라 감사 조운규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영조는 그를 직접 심문하였으며, 2월에 사형당하였다. 그 때 소론 일파인 박찬신·김윤·조동정·조동하 등도 함께 처형되었으며, 이광사·윤득구 등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 3월에는 조태구· 김일경 등에게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을 적용하였다. 5월에는 나라 안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에서 보던 과거인 정시 가운데 토역경과 정시에서 윤지 일파인 심정연이 답안지에 조정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뒤에 춘천에서 역모 사건이 발각되자 심정연은 이 역모 사건의 주모자인 윤혜·김도성·신치운와 공모자인 김인제·이전· 이준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이후 소론은 세력을 잃고 거의 몰락하게 되었다.
영조는 《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1721년에 일어난 신임사화에서부터 1755년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났던 이러한 사건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책을 펴낸 목적은 역사적인 사실을 후세의 거울로 삼자는 데 있었다. 문인 김재로 등이 편찬하고, 4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따로 한글로 풀이하여 놓은 책이 4권 전한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