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고종 5)에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분묘를 몰래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들을 훔치려다 실패한 사건. 덕산 굴총 사건·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고도 한다.
충청 남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 분묘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이구(?~1822)의 묘이다. 오페르트는 유대계 독일 상인으로, 남연군의 시신을 훔친 후 그것을 미끼로 하여 흥선 대원군에게 통상을 요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이 일을 시도했다.
원래 중국의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에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로부터 두 차례 모두 거절당하자, 조선인들이 조상의 시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남연군의 묘를 파헤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868년에 140명의 남연군 분묘 도굴단을 구성하여 다시 조선을 찾아온 것이다. 도굴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일본 나가사키에서 도굴할 때 필요한 도구들과 머스킷 소총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선장 묄러, 통역을 맡아 줄 프랑스 선교사 페롱과 조선인 천주교도 몇 명, 필리핀 · 말레이시아·유럽· 중국의 승무원 100여 명 등을 1,000t급 기선인 차이나호와 그레타호에 태우고 조선을 향해 출항했다.
이들의 명분은 조선과의 통상 체결을 이루려는 것이었으나, 통상 요구를 하지 않은 채 1868년 5월에 곧바로 충청 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상륙 직후 이들은 스스로를 러시아 군병이라고 속이면서 조선인들에게 함부로 총칼을 휘둘렀으며, 덕산 군청을 습격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덕산 가동에 있는 남원군 분묘로 향한 이들은 어둠을 틈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묘지기와 가동의 몇몇 주민들, 덕산 군수 이종신 등이 묘를 파헤치지 못하도록 끝까지 대항했지만, 무기를 지닌 이들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남연군의 시신이 담긴 관 뚜껑이 파헤쳐졌을 때쯤 날이 밝아 왔고, 주민들이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하자 이들은 파낸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구만포로 철수했다.
곧바로 이 사건은 관찰사 민치상에게 알려졌으며, 군관들을 출동시켜 이들을 추적했으나 감쪽같이 달아난 후였으므로 찾을 수가 없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남연군의 시신을 훔쳐 가려 했던 이 사건은 외국 선교사들과 외국 상인들에 대한 흥선 대원군의 거부감을 더욱 부채질하게 되었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과 쇄국 정책을 더 강화했고, 대외적으로는 서양인들의 위신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미국인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해 고발당하게 되었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후에 미국 법정에 선 젠킨스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도굴단을 구성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조선이 쇄국 정책을 풀고 개방적인 무역 활동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들의 조선 항해 목적은 첫째, 조선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 둘째, 조선의 사신 1명이 세계 일주 여행을 하도록 돕고, 셋째, 이것을 계기로 조선을 세계 곳곳에 소개하자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