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과거 전통적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의 신분. 보통 종이라고 부르는데, '노'는 남자 종을 뜻하고, '비'는 여자 종을 뜻한다.
우리 나라의 전통 사회는, 각기 다른 사회적 특권과 제약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계층이 상하로 연결되어 신분의 위치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 구조는 크게 보아 귀족과 양인, 그리고 천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천인의 대표적 존재가 바로 노비였다.
우리 나라의 노비 제도는 금속 연모를 사용함으로써 생산력이 발달하고 본격적인 정치 권력이 형성되었던 초기 고대 국가 단계에 이미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 시대의 '8조 법금'에 남의 집 물건을 훔친 사람은 그 피해자 집의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었고, 노비가 된 사람이 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을 물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고대 부족 국가인 부여의 법률에도 살인자의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이 있다. 또 1,000명이 훨씬 넘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땅에 와서 나무를 베다가 잡혀서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삼국 시대에 와서는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남에게 빚을 지고 갚지 않은 사람, 너무 가난해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등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포로는 가장 중요한 노비 공급원이었다. 전쟁 포로를 국가 기관이나 참전 장수 개인에게 나누어 주어 노비로 삼았는데, 여기서 국가 기관이 소유한 노비는 공노비, 개인이 소유한 노비는 사노비로 구분하게 되었다. 노비를 소유한 숫자에 따라 재산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으며, 노비의 매매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비 가 서양의 노예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가 많다. 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 신라전에 통일 신라 시대의 당시 사정에 대해 재상의 집에 노비가 3,000명이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들 개인 소유의 사노비는 대다수가 거주지를 따로 갖고 있는 외거 노비로서 농사일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신라 촌락 문서》의 기록을 보면 4개 촌락의 총인구 442명 중에 노비 숫자는 25명으로, 이들 중 19명이 20대의 장정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노비의 대부분이 노동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더 구체적인 노비 제도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다. 후삼국 시대 이후 세력 있는 호족들이 많은 노비를 소유함으로써 이를 경제적·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고려 시대의 노비
고려가 건국된 뒤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들의 세력을 억압 하기 위한 정책으로서 광종 7년 때인 956년에
노비 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여 호족들이 불법적으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나중에 호족들의 반발과 노비 안검법에 의해 해방된 노비 중에 불손한 자들이 있어 성종 6년 때인 987년에 해방된 자들을 다시 노비로 돌리는 노비 환천법(奴婢還賤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된다. 공노비는 전쟁 포로는 물론, 반역이나 적을 이롭게하는 행위 등의 범죄 를 저지른 자와 그들의 가족 및 국가에서 몰수한 사노비들로 이루어졌다. 공노비는 다시 관청에서 노역에 종사하는 공역 노비와, 따로 거주지를 갖고 있으면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외거 노비 또는 농경 노비로 구분된다. 공역 노비는 10여 세에서 60세가 될 때까지 노역을 부담하면서 그 대가로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자유롭게 결혼을 하여 가정 을 꾸릴 수도 있었으며, 60세가 지나면 노역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주인의 소유가 되는 사노비 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외거 노비는 나라가 소유한 땅을 경작하여 수확의 일정한 양을 세금으로 국가에 납부하는 것 이외에도 그 밖에 정해진 공역을 부담해야 하였다. 공노비의 대부분은 외거 노비였는데, 고려 시대 후기로 가면서 공역 노비도 점점 외거 노비처럼 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사노비는 토지나 집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중요한 재산으로 인정되어 상속· 매매·증여가 가능하였으며, 특별한 공적인 의무는 없었다.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얹혀 올라가 있었는데,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이들은 부모 중에 한 사람이라도 노비이면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들에 대한 소유권은 정종 5년 때인 1039년에 제정된 법에 따라 어미의 주인에게 있었으나, 어미가 양인일 경우에는 아비의 주인이 소유하게 하였다. 이들 사노비의 주인은 왕족과 관리·권세 가문·지방의 아전·일반 양인 등 다양한 계층이었으며, 한 집안에서 1,000명이 넘는 사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주인은 사노비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다루든지 법의 제재를 받는 일이 없었다. 사노비는 주인에게 거의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하고, 주인이 국가에 반역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배반하는 일이 용납되지 않았다. 주인의 혹사에 못이겨 도망을 쳤다가 붙잡히면, 문종 3년 때인 1049년에 제정된 법에 따라 얼굴 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내린 뒤 주인에게 돌려줬다. 예외적으로 주인에게 특별한 충성을 하는 경우에는 노비의 신분을 면해 주는 면천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주인을 대신하여 전쟁에 참가해서 큰 공을 세우거나, 주인을 대신하여 무덤 옆에 오두막을 짓고 3년상을 지내 주인에게 공을 인정받으면, 주인의 보고에 따라 40세 이후에는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해 주었다. 사노비의 종류는 솔거 노비와 외거 노비가 있는데, 솔거 노비는 주인의 집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제공받으며 함께 살면서, 무제한적이고 무기한적인 노동을 제공해야 하였다. 이들은 주인 가족의 일원으로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온전한 가정 생활이 불가능하였다. 이들은 하나의 물건처럼 주인에게 소유되어 노비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에 반해 외거 노비는 주인과 따로 살면서 독립된 가정 생활을 함으로써 솔거 노비보다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기재되는 외에 현거주지에서 별도의 호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들은 일종의 소작농으로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수확량의 일부를 주인에게 세금처럼 바치고 나머지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주인 이외의 다른 사람의 토지를 경작하여 집안 살림을 나아지게 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외거 노비가 솔거 노비 와는 달리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외거 노비는 양인 소작인과 처지가 비슷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말기인 우왕 이전까지는 국가에서 외거 노비에 대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 같은 경제적인 수취를 하지 않았으나, 우왕 때부터 일정한 액수를 거두어들였다.
조선 시대의 노비
조선이 건국된 직후에는 고려 왕실과 귀족 및 죄인들이 소유한 노비들을 정리하고, 태조 4년 때인 1395년에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正都監)을 설치하여 노비의 소유권 분쟁 이나 상속, 양인과 천인의 신분 판정 등 사노비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썼다. 이처럼 조선 시대 초기에 노비 변정 사업을 추진한 까닭은 사노비를 공노비로 만들어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동시에 새로운 왕조의 신분 질서를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였다.
1406년에는 사찰을 정리하여 거기에 속한 노비 8만여 명을 공노비로 확보하였으며, 1419년과 1424년 두 차례에 걸쳐 나머지 사찰 노비를 철폐하여 국가에 귀속시켰다. 한편, 조선 시대의 노비도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분되었는데, 공노비 중에서 궁중의 내수사에 속한 내노비는 왕실의 노비라는 뜻에서 궁노비라고 불렀으며, 소속된 관청이 행정 기관일 경우에는 관노비라고 불렀지만, 역이나 향교 와 같이 특수한 관청일 경우에는 역노비나 교노비라고 불렀다.
16세부터 60세까지의 공노비는 그들의 의무 내용에 따라 노역을 바치는 노비는 선상 노비, 현물을 바치는 노비는 납공 노비로 구분되었는데, 서울에 사는 공노비는 모두 선상 노비였다. 선상 노비는 중앙 또는 지방의 각 관청 에 차출되어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해야 하였으며, 지방 관청에 노역을 들어갈 경우에는 7번으로 나누어 교대하였다. 지방에 사는 선상 노비가 서울에 있는 관청에 노역을 들어올 경우에는 2번으로 나누어 교대하였으며, 이들에게 일종의 심부름꾼으로 2명의 봉족 노비를 붙여 주었다. 봉족 노비 는 책임자격인 선상 노비에게 해마다 면포와 정포 각 1필씩을 바쳤다. 납공 노비의 경우에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남자 노비인 노는 해마다 면포 1필과 저화 20장씩 바쳐야 하였고, 여자 노비인 비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씩 바치도록 규정하였다. 당시에 사용되던 지폐인 저화 20장은 면포 1필에 해당하였으므로 노는 면포 2필, 비는 면포 1필 반을 바치는 셈이었다. 따라서 3명의 장년 남녀로 구성된 노비 가정의 경우 1년에 5, 6필의 면포를 바쳐야 하였다. 납공 노비들은 이 밖에도 소속한 관청의 음식을 책임져야 하는 등 양인 장정의 국가에 대한 의무보다 2배 이상 무거운 부담을 져야 하였다. 이들이 바치는 현물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을 차지하여 성종 18년 때인 1485년에는 면포 가 72만여 필에 정포가 18만여 필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노비의 경우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선상 노비로 차출되어 서울로 올라온 자들 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일이 많아졌고, 또 조금 부유한 공노비는 돈을 주고 선상 노비의 노역을 면제받으려고 하는 일도 잦아졌다.
나중에는 가난한 노비들까지도 무리를 해서 선상 노비의 노역을 면제받으려고 하여 그 대가가 면포 15필로 뛰는 등 폐단이 생겼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폐단을 막고 공노비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경국대전》에 법으로 정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노비들의 호적을 20년마다 한 번씩 정식으로 작성하고, 3년마다 한 번씩 추가되는 내용을 정리해서 작성하여 의정부와 형조, 각 해당 도와 읍 등에 보관시켰다. 또 도망한 노비를 잡지 못한 관리와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와 이웃을 법률 위반으로 다스리고, 도망한 노비를 신고하면 4명마다 1명을 상으로 주며, 힘든 일을 피하여 편한 곳으로 옮기려 한 노비나 청탁을 받아 이에 협조한 관리는 곤장 100대를 때리고 먼 곳으로 보내어 중노동을 시키거나 국경 지방의 수비로 삼는 도형 3년의 형벌을 내렸다. 뇌물을 받고 다른 노비로 노역을 대신하게 한 관리는 곤장 100대를 때리고 작은 고을의 역리로 좌천시키는 징계를 내렸다.
한편, 조선 시대의 사노비는 상전 가족의 구성원으로 함께 생활하는 경우에는 솔거 노비 또는 가내 노비, 따로 살면서 독립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경우에는 외거 노비로 구분하였다. 솔거 노비는 조선 시대 노비 중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집안 살림을 꾸리지 못하고, 재산을 모은다거나 행동의 자유 등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여자 노비의 경우에는 주인의 첩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