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국조인 단군을 섬기는 신앙.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전해져 오는 우리 고유의 민간 신앙으로, 오래도록 남아 내려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단군의 할아버지로 하늘의 황제인 환인과 그의 서자로서 단군의 아버지이기도 한 환웅을 포함한 삼신을 그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삼신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로서 《삼신각개설》과 《삼신일체설》 등으로 나뉘어지도 하는데, 앞의 의견은 환인을 하늘의 신, 환웅을 땅의 신, 단군을 사람의 신이라 하여 이 삼신이 다같이 하느님과 같은 신으로서 각각 존재한다는 것이며, 뒤의 의견은 하나의 하느님인 삼신이 하늘·땅·사람의 성격을 가지고 분리되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단군을 태양신 또는 산신으로 숭배하기도 하는데, 태양신이라는 우리말로 표현하였으나, 당시 우리 문자가 없어서 이두로 표기를 하면서 단군이라고 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에서는, 단군이라는 말이 고대의 제사 와 정치가 하나로 합쳐져 있던 시대의 제천단의 제사장이었던 천군의 음이 잘못 전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단군 신앙에는 우주의 절대이며, 오직 하나뿐인 하늘의 신은 물론 자연신인 달을 비롯한 모든 신을 받들어 하나의 신과 여러 신의 형태가 합쳐져 있다. 한편, 옛날 사람들은 환웅이 도읍으로 정했던 태백산을 삼신산이라 하여 삼신 신앙의 제천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10월 3일과 3월 16일을 삼신 제천일로 정하여 연중 행사를 거행했는데, 이것은 세검맞이굿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단군 신앙은 하나의 조직적인 종교 단체로까지 성립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 이후 일제 강점기에 민족 의식을 높이며 교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 교단에서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교리는 단군을 국조로 보는 것과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 인간이다.
또한, 경전으로는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경》 등의 3대 기본 경전이 있는데, 이를 삼화개천경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천부경》은 환인 시대의 구전이요, 《삼일신고》는 환웅이 말하여 밝힌 것이며, 《참전경》은 환인이 직접 366사를 다스린 기록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 신앙의 유적과 전통은 오늘날 한국의 민간 신앙과 생활 문화 속에 많이 남아 있으며, 불교나 유교 의 여러 의식 속에 남아 있다. 이러한 단군 신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사료나 유물 중에는 고조선의 신앙이나 의례를 설명해 줄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진한의 소도 등에서 천신에게 제사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그와 비슷한 하늘의 황제에 대한 제사 의 전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단군 신앙의 전통이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삼국사기》의 선인왕검의 기사와 1131년 묘청이 임원궁에 지은 8 성당의 하나인 고구려평양선인 실덕연등불을 살펴보면 최소한 12세기 이전에도 단군을 수호신으로서 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에 이르러 거란과 몽고의 침략이 계속되자 고려 사회의 내부 갈등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서 단군을 국조로 생각하는 책들이 계속해서 지어졌다.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이 대표적인 책이며, 그 후 조선 초기의 《조선경국전》 《삼국사략》 등으로 이어져 단군이 조선족의 건국 시조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평양의 단군사나 구월산의 삼성사 등에서 국가적 의례로서 단군을 섬기기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 내기 위하여 민족주의 역사관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생각에서 단군 신앙이 재조명되었다. 대표적 예로는
신채호의 《
조선상고사》를 들 수 있다.
근래에 와서 교단 체제를 갖추고 단군교를 선포한 것은 1904년의 일로, 백두산 대숭전에서 백봉을 중심으로 한 33명이 모임을 가진 것이다. 백봉은 백두산에서 10년 가까이 천신에 기도하여 단군에 관한 자료와 경서들이 숨겨져 있는 곳을 발견하였는데, 이 곳은 발해의 문왕 때 만들어진 곳이라고 한다. 그 뒤 1909년 정월 보름에
나철이 한성 북부 재동 취운정에서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종교 단체인 단군교(후에
대종교로 이름을 바꿈)를 선포하고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밖에도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새로운 종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종교들은 단군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최제우나 증산교의 강일순 등을 함께 숭배하는 경우가 많아서 순수한 단군 신앙 교단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단군 신앙은 민족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집단적인 상징으로서 큰 역할을 해 왔다. 고려 말이나 조선 후기에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한 것은 단군 신앙 이 낳은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단군을 숭배하는 중요한 교단으로는
대종교·
단군교·
단군 숭녕회·
배달교·
한얼교·
현정회 등이 있고, 학회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단단학회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단군 단일 신앙 이외에도 계통이 다른 교단에서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포함시키는 복합 신앙 종단도 있으며, 신앙의 대상은 아니지만 사묘를 마련해 단군을 모시는 종단도 있다. 이러한 종단으로는
동도교·
무량 천도교·
보화교·
삼덕교·
수운교·
용화불사·
증산 선불교·
천화불교 등이 있다.
우선
대종교에 대하여 살펴보면, 순수한 단군 종단 가운데 하나인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에
나철 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교단 본부를 만주 지방으로 옮겼으며, 종교 활동과 함께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8·15 광복이 되면서 교단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으며, 한때는 한국의 6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으나 현재는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경전으로 《
삼일신고》가 있다.
나철과 함께
단군교를 창교했던
정훈모는 단군교를 대종교로 바꿀 당시 이에 반대하여 그대로 단군교의 이름을 써야 한다고 하면서 대종교와 분리하여 단군교를 세웠다. 그 후 단군교는 조선 총독부의 공인을 받기도 하였으나 정훈모의 사망 이후에는 거의 활동하지 않아 지금은 그 세력이 미약한 상황이다.
현정회는 1968년 9월 3일 서울사직공원 안에 세워진 단군성전 및 사직 기념관의 낙성 봉축 제전을 계기로 하여 발족된 것으로 사직신과 국조 단군 봉향의 영구 지속을 도모함과 동시에 단군 사상을 길러 민족 의식을 높이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되었다.
한편,
단군숭녕회는 1945년 이담을 대표로 하는 단군전봉건회로부터 시작되었는데, 1958년에는 단군을 모심으로써 민족의 주체 의식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그 이름을 단군 숭녕회라고 바꾸었다. 이들은 60년대 초 민족 주체 의식의 신소생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1967년
신정일에 의하여 창시된 종교 단체인
한얼교는 단군을 교조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 민족 종교를 표방하였다. 교명을 1978년에 바꾸었는데, 주요 행사로 강화 마니산 성지 순례, 해외 교포 얼찾기 운동 등을 벌이고 있다.
단단학회는 일명 커발한이라고도 하며, 이기의 단군에 대한 사상이나 학문을 말하는 단학의 연구와 나철의 단군 신앙을 함께 닦는다는 취지를 지녔다. 최근까지도 단군에 대한 역사· 종교· 문화· 사상 연구를 주로 하고 있으나 종교 단체로서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대종교의 삼일원장
안호상이 단군에 대하여 종교적·철학적 연구를 하고자 1963년 학술 단체로 창립한 배달 문화 연구원에서는 그 동안 단군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발행한 바 있으며, 이 밖에도 현재의 활동은 거의 미미하나 단군 숭모회· 단군 정수회·단민문화원·신단 정도회· 한국 종단 연합회 등이 단군 사상의 보급에 힘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