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부의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하는 운하. 전체 길이 1,515㎞. 원래의 길이는 1,782㎞였으나 1958년에 복구·확장 공사를 하며 정비되었다.
대운하는 하이허강· 황허강·화이허강· 양쯔강·첸탕강 등 5개의 대하천을 연결한 운하로,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생활 필수품 등을 보다 쉽고 대량으로 운반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중국에는 전체적으로 동서쪽으로 흐르는 큰 강들이 많아 예로부터 동서쪽의 물길을 따라 물건이나 사람을 배로 실어 나르는 운송 방법이 발달하였다. 남북쪽으로는 웨이허강이나 워허강·잉허강 등이 흐르고 있으나 부분적으로 배가 다니는 수로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대운하는 오랫동안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 지방과 생산물이 많아 부유하였던 강남을 연결하고, 화북과 화중·화남을 정치·경제적으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기의 대운하는 이미 진(秦)나라와 한나라 때부터 황허강 과 화이허강을 연결하는 수로와, 다시 산양독이 이어지는 화이허강과 양쯔강이 수로로 연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4세기 초의 진(晋)나라 때 강남 지방으로 한족들이 대량으로 이주하여 뱃길과 개발되자 운하가 개척되었지만 주로 부분적으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장안 을 수도로 정하자, 산양독·통제거·영제거·강남하 등을 다시 수리하여, 황허강·웨이수이강을 거쳐 남북의 뱃길을 장안으로 연결하는 수로를 완성하였다. 이후 당·송나라 때의 대운하는 남북을 연결하는 수로 교통의 중심으로서, 강남이 발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원나라때는 황허강 유역의 둥안전과 웨이허강 유역의 린칭을 연결하는 새로운 후이퉁 운하가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양쯔강 유역에서 운하로 톈진에 이르고, 다시 바이허강을 이용하여 베이징 까지 쉽게 갈 수 있는 수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때에는 운하를 통하여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값이 비싸고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거의 바다를 통하여 물건들을 운반하였다.
그 뒤의 명나라 때는 난징에 수도를 정하였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운하의 역할은 매우 컸으며, 이러한 대운하의 기능은 청나라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특히, 명나라 때는 쉬저우 를 지나는 우회 수로 대신 직통 수로를 여는 등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에 여러 차례의 대홍수로 황허강의 둑이 무너져 쉬저우와 칭장을 연결하는 운하에 큰 문제가 생겼고, 린칭과 지닝을 연결하는 운하도 끊기게 되었다. 또한 1850~1864년에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 때문에 운하를 이용하여 베이징에 식량을 운반할 수 없게 되자 점점 못쓰게 되었다.
이 후에 오랫동안 손보지 않았던 것을 1958년에 운하의 깊이와 폭을 늘리는 등 여러 가지 공사가 시작하여, 운하 근처에 13개의 항구를 새로 건설하고 물의 양을 조절하는 수문 등이 설치되었다. 이 결과 베이징의 쭤안먼 밖에는 4,000t급의 배가 들어올 수 있는 부두가 건설되어,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항해가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