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시대부터 역사 시대의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나타난 무덤의 하나로, 구덩이를 파서 시체를 묻거나 구덩이 없이 지면 위에 시체를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일정한 구역을 정해 무덤을 만든 것.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방식 고인돌과 공통점을 이루는데, 원래 고인돌이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 앞에 제물을 쌓아 놓기 위해 만든 상석이 없어져 돌무지무덤이 되었으리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초기의 것으로는 2, 3개의 돌덧널이나 돌널을 두고 그 위에 커다란 돌덩이를 덮은 것이 발견되는데, 랴오둥 반도 일대의 장군산·노철산·우가촌 타두 무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은 돌무지 밑의 묘 안에 중심이 되는 주체가 없고 여러 유해가 같이 있으며, 시설 또한 특별한 것이 없고, 딸린 물건도 서로 비슷하다. 따라서 무덤에 묻힌 유해는 가족이거나 서로 밀접한 혈연 관계 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무덤에 묻힌 유해 사이에 딸린 물건이나 무덤 시설에 뚜렷한 차이점이 없는 돌무지무덤 은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바로 토기 조각과 돌촉 등의 석기류 몇 점이 같이 묻혀 있는 춘천시 천전리 돌무지무덤과 제주시 용담동 돌무지무덤 등이 그것이다. 랴오둥 반도 다롄시의 강상 무덤과 누상 무덤이 그 다음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이러한 무덤은 많은 사람을 묻는데, 중심이 되는 무덤과 주변 무덤 구덩이의 사이에 딸린 물건과 무덤 시설에서 변화를 보인다. 강상 무덤은 동서 길이 28m, 남북 길이 20m 되는 직사각형 묘역 안에 23기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는데, 판돌로 정성들여 만든 7호 무덤 주변에 거친 자갈로 만든 22개의 무덤 구덩이가 놓여 있으며, 이들 주변 무덤에서는 140여 명이 한꺼번에 화장된 채로 묻혀 있다. 동서 길이 30m, 남북 길이 24m인 누상 무덤에서도 1·2호 돌덧널무덤 주위에 10개의 돌덧널이 배치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화장된 많은 뼈가 나왔다. 이들 무덤에서는 비파형 동검과 함께 마구류· 수레 부속· 방패·활촉· 도끼·끌과 각종 장신구가 부장품으로 발견 되었으며, 이로써 수십 명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높은 지위의 사람이 죽을 때 노예도 같이 묻힌 무덤이라는 주장 도 있다. 그 후 돌무지무덤은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 보이는 돌무지무덤에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돌무지무덤 을 만들어 왔는데, 초기에는 모래 강변에 네모나게 냇돌을 깔고 그 위에 널을 놓은 다음 냇돌을 덮는 간단한 구조를 보인다. 그러다 점차 냇돌 대신에 돌을 깨서 만든 할석을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았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돌무지의 겉모습은 대체로 방대형을 이룬다. 그 후 3세기 말~4세기 초에는 중국의 돌방무덤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돌무지무덤의 중심부에 널길이 달린 돌방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 계층에선 주로 커다란 돌방을 2개의 관을 같이 놓을 수 있는 쌍실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부부를 같이 묻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장군총·태왕릉·천추총 등이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 유역의 랴오닝성 위안런현 지방과 압록강 남안인 독로강 유역의 시중군·자성군·위원군 등에 주로 모여 있다.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형태상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 기단식, 단이 없는 무기단식, 널길과 돌로 만든 널방이 있는 기단식 적석총 등으로 세밀히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부터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도 돌무지 무덤이 나오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의 돌무지 무덤의 특징은 고구려의 재래식 무덤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얕은 대지 위에 네모난 돌무지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가운데 주검을 넣었으며, 제일 아랫단의 네 변에는 돌이 무너지지 않도록 각각 버팀돌을 설치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무지 가운데는 1 변이 50m가 넘는 것도 있을 만큼 거대하였다.
석촌동 3 호분은 보존이 잘 되지 않아 크게 파괴되었지만, 남북 길이가 43.7m이고 동서 길이가 대략 55.5m인 대형 돌무지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촌동 3 호분은 제1단의 가장자리에 큼직한 판석을 놓고 그 위에 작은 판석을 한두 겹 얹고 안쪽을 크고 작은 막돌로 메운 것이다. 4 호분은 3단으로 된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위에 돌방과 형식적인 널길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돌방무덤 보다 앞선 단계를 보여 주고 있지만 돌무지무덤으로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이다. 또 4 호분은 환인현 고력묘자 제11 호분과 흡사하다. 만들어진 연대는 모두 4, 5세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백제의 개로왕이 유리하에서 커다란 돌을 주워 돌덧널을 만들고 아버지를 묻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편, 냇돌을 쓴 재래식 돌무지무덤 이 한강 상류인 양평군 문호리, 춘천시 중도, 제천시 교리·도화리 등의 남한강 유역에서 보인다. 문호리의 것은 1 변이 약 10m, 높이가 2.7m 되는 네모꼴 무덤으로 강가에 냇돌을 깔고 세 사람의 시체를 놓은 다음 직접 3단 피라미드형으로 냇돌을 쌓은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에서 가장 오래 된 형식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도화리의 것은 3단의 기단은 갖추고 있으나 석촌동 4호분에서와 같이 널길과 돌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한강 유역의 돌무지무덤들은 고구려 무덤일 가능성도 있지만, 압록강· 대동강 지역 과 한강 유역 사이가 돌무덤 분포상 단절되었으므로 역시 백제 초기의 백제 고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곳에서 출토된 김해 토기·철제 무기, 퇴화된 민무늬 토기편들로 보아 그 연대는 2, 3세기로 짐작되며, 백제 초기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