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이충무공의
명량 대첩의 전공을 기리어 세운 비석. 정식 이름은 ‘통제사 충무공 명량 대첩비’이다.
1597년(선조 30년)에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 함대를 크게 쳐부순 싸움을 기념하여 대첩이 있은 지 91년째 되는 1688년(숙종 14년)에 세운 것으로, 전라 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다.
일제 때 경복궁에 옮겨진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제자리로 옮겨 세웠다. 보물 제50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597년(선조 31) 9월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무고로 통제사에서 물러났다가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기용되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우수영(右水營)을 옮기고, 몰려오는 133척의 왜적 함대를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내용의 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명량대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대회전(大會戰)으로, 그가 세운 전공의 중흥이라 일컬으며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순신이 난을 당하여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 결정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고 하였다.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鳴梁大捷碑)’의 12자 전액(篆額)은 김만중(金萬重)의 전서(篆書)이고 문장은 이민서(李敏敍), 글씨는 이정영(李正英)의 해서이다. 비문은 1686년(숙종 14)에 쓰여졌으나, 비는 2년 뒤인 1688년 3월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朴新胄)에 의하여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