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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시체나 유골을 묻은 곳. 무덤 또는 뫼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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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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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시체나 유골을 묻은 곳. 무덤 또는 뫼라고도 한다.
무덤의 모양이나 무덤에 대한 믿음, 관습은 종족이나 나라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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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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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원문/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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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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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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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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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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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씨라꼬 아주 유명한 집안이여. 이 집안에 한 양반이 인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머리만 메고 다니는 거여. 그러니 시체를 짊어지고 다닌 것인데, 왜 그런고 하면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서 묻는다고 그렇게 다닌겨. 그래 다니다가 들어보니 사람들이 진개명개오야이뜰이라고 거기가 명당자리라고 그라거든 거기가 어디냐 하면, 저 전라도 최고평야야, 진개명개오야이뜰 하는데 바로 거기여,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 평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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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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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진동면 서곡리(창화동)112번지 소재에 있는 고분은 고려조 판후부사 한조(문구공)의 아들인 예문춘추관태학사 한상질(1350~1400)의 것이며 문열의 시호를 받은 대학자 묘 (한명회 조부모)라 한다. 그 묘 하단에 12지신상벽화 분묘가 있으나 이는 전설에 의하면 문열공이 일시적 애처가 되었던 무당등의 좌수(무속도감) 묘라는 말도 나오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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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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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조는 숙종대왕의 후궁인 숙빈 최씨로 부터 서기 1694(숙종 20)에 탄생하였으며 1719(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49세로 서거했다. 영조대왕은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별궁과 같이 사냥을 취미삼고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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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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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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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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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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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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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포천의 어느 시골에 이 진사와 박 진사가 살았다. 하루는 이 진사가 고개 넘어 박 진사네 잔칫집에 가게 되었다. 가서 술과 음식으로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고개를 넘어서 집에 오기가 힘들게 되었다. 고개 너머에 산소가 많이 있었는데, 이 진사는 거기쯤에 와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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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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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달성 서씨 집안에서 산소를 쓰려 하였다. 그 때 풍수지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무쇠를 쓰고 총을 들고 노루를 쫓거든’ 산소를 쓰라고 했다. 그 후, 비가 내리는 날에 어떤 사람이 총을 쏘면서 노루를 쫓고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무쇠로 만든 솥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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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등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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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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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포천의 어느 시골에 이 진사와 박 진사가 살았다. 하루는 이 진사가 고개 넘어 박 진사네 잔칫집에 가게 되었다. 가서 술과 음식으로 대접을 잘 받았는데, 그만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고개를 넘어서 집에 오기가 힘들게 되었다. 고개 너머에 산소가 많이 있었는데, 이 진사는 거기쯤에 와서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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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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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묻어 주기 위해 송장을 들쳐업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송장을 묻으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반도 안 팠는데, 커다란 바위가 나왔다. 사람들은 힘을 모아 그 바위를 뽑았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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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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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사람이 죽으면 지관을 불러 묘를 썼다. 어느 집안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손자들이 모여 지관을 불렀다. 지관이 손자들에게 말했다.“석 자를 못 파서 바위가 깔렸을 게야. 그러면 돌을 떼지 말고 거기다 시신을 모시게.” 하지만 손자들은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는 바닥에 있던 돌을 들쳐 내었다. 그러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연기가 감돌며 학이 나왔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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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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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송씨네 산에 ‘파명당’이라는 명당이 있었다. 옛날에 송씨네 부모가 죽어 산소를 쓰려할 때 도사가 산세를 잡아 주었다. 도사가 땅을 아주 조금만 판 후에, “널만 묻을 정도로 덮어라.” 고 했다. 그러자 송씨네 사람들이 너무 놀라 “아버지, 어머니를 어떻게 땅 위에다 모십니까?”라고 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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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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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구룡폭포에 묘가 있었다. 어느 지관이 일렀다.“산소자리를 구 척 파라. 그러면 툭 불거진 데가 나올 것이다. 그 위에 관을 그냥 모셔라. 또한 하관 시에는 독력골서 새벽 세시에 노루가 세 번 울 때 하관을 하라.” 지관의 말 대로 사람들이 산소자리를 파보니 거기에 큰 돌이 두 개 있었다. 상꾼들이 산소 자리를 평평하게 하기 위해서 그 돌을 깨자, 돌에서 피가 주르륵 나오고 그 자리에서 매 한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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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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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어떤 중이 원님을 찾아가 하룻밤을 같이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이 한밤중에 슬그머니 일어나 바랑을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하도 이상해서 원님이 따라가 보니, 중은 산으로 올라가 어느 한 곳을 팠다. 그러고는 바랑 속에서 해골 하나를 꺼내어 그 곳에다 묻었다. 이것을 보고 먼저 돌아온 원님이 자는 척하고 있으니, 중도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누워 잤다.【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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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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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지관에게 묘자리를 물었다. 그런데, 어느 집안이 지관에게 묻지 않고 아무 곳에나 묘를 쓰려고 하니 그 마을의 유명한 지관이 하는 말이“그 곳에 묘를 쓰면 삼태생이는 낳아도 아들 셋은 다 호환을 당합니다.” 라고 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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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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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어느 가난한 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남의 논에 있는 피를 가져다가 먹고살았다. 그러던 어느 가을, 부인은 남편에게 “배고픈 것이 가장 큰 설움이니 아이들과 배불리 실컷 먹고 죽더라도 오늘 저녁은 벼를 훔쳐다가 밥을 해 먹어요.” 라고 말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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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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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에 한 형제가 살았는데, 큰집은 형이 지관 일을 해서 잘 살고, 동생네집은 못살았다. 어느날 동생의 마누라가“여보, 큰댁은 잘 사는데 우리는 못사니 어떡하면 좋우.”“큰댁은 형님이 산소 자리를 보니까 잘 살지만, 나야 뭐 산소자릴 볼 줄 알아야지?” 라고 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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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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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머슴이 있었는데, 갯가에 나갔다가 처녀가 물에 빠져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시체를 간(姦)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아무리 죽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지게에다 시체를 짊어지고 산으로 가서 잘 묻어주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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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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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달성 서씨 집안에서 산소를 쓰려 하였다. 그 때 풍수지리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무쇠를 쓰고 총을 들고 노루를 쫓거든’ 산소를 쓰라고 했다. 그 후, 비가 내리는 날에 어떤 사람이 총을 쏘면서 노루를 쫓고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무쇠로 만든 솥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인용】포천의 설화(포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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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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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적성면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으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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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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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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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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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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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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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리 나라 조선조에는 여성들의 개가금지법으로 인하여 일부종사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녀과부를 비롯 수절한 열녀, 열부가 많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갖은 사연도 많았거니와 관하 자운서원경내에 있는 율곡선생님 내외분의 분묘가 전후면에 있는 것을 보게되어 누구나 의아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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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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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조는 숙종대왕의 후궁인 숙빈 최씨로 부터 서기 1694(숙종 20)에 탄생하였으며 1719(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49세로 서거했다. 영조대왕은 어려서부터 무예와 산타기를 좋아하여 틈만 있으면 별궁과 같이 사냥을 취미삼고 이 산 저 산을 두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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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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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진동면 서곡리(창화동)112번지 소재에 있는 고분은 고려조 판후부사 한조(문구공)의 아들인 예문춘추관태학사 한상질(1350~1400)의 것이며 문열의 시호를 받은 대학자 묘 (한명회 조부모)라 한다. 그 묘 하단에 12지신상벽화 분묘가 있으나 이는 전설에 의하면 문열공이 일시적 애처가 되었던 무당등의 좌수(무속도감) 묘라는 말도 나오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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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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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오두산을 김포쪽에서 바라보면 흡사 노란 저고리 붉은 치마를 입은 젊은 색시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배를 타고 건너와 보면 그 색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다시 돌아가 오두산을 바라보면 그 색시가 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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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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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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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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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씨라꼬 아주 유명한 집안이여. 이 집안에 한 양반이 인제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머리만 메고 다니는 거여. 그러니 시체를 짊어지고 다닌 것인데, 왜 그런고 하면 좋은 명당자리를 찾아서 묻는다고 그렇게 다닌겨. 그래 다니다가 들어보니 사람들이 진개명개오야이뜰이라고 거기가 명당자리라고 그라거든 거기가 어디냐 하면, 저 전라도 최고평야야, 진개명개오야이뜰 하는데 바로 거기여,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 평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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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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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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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12가지의 지지 중에서 네 번째를 나타낸 것. 토끼를 말하는 것이며, 시각으로는 12시의 네 번째인 묘시로서,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의 시각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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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혼백을 모시거나 그 밖의 여러 신을 모신 곳. 묘당·묘우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들의 집에서는 가묘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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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논과 밭의 넓이를 재는 단위. 중국의 주공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제정하였으며, 논과 밭의 넓이를 재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1묘의 넓이에 대한 기준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크게 변화되어 왔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30평(99.174㎡)으로 정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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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달로그 작업
▣ 참조정보
없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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