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 ~ 1913] 한말의 의병장. 본명은 태현으로 태수는 의병장 시절의 이름이다.
경상 남도 함양군 안의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금강산에서 병법에 대한 병서를 공부하였으며, 1905년 서울로 와서 최익현을 방문한 뒤 호남 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에 팔공산 으로 이동한 뒤 장수읍을 공격하여 되찾았으며, 무주 부남면을 습격하는 등 일본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 후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삼고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3남 지방에서 의병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대한 관동창의장 이인영'의 이름으로 군병을 모집하거나 널리 일반에게 알려 부추기기 위한 격문이 내려지자, 각 도의 대표들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는 호남 창의대장에 임명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일진으로서 구성되었다.
1907년 12월 각 도의 의병 부대가 서울을 총공격하려는 진격 계획을 세웠으나, 총대장인 대한 관동 창의장
이인영이 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가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에 따라 문태수도 자기 밑에 있는 의병 100명을 이끌고 본래의 근거지인 무주로 돌아왔다.
1908년 2월 28일 약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습격하여 전투를 벌이던 도중에 붙잡혔으나 곧 탈출하였다. 그 해 4월 10일 신명선이 지휘하는 부대와 힘을 합쳐 의병 100명을 이끌고 장수읍을 습격하였다. 때마침 주재소에는 모두 의병을 토벌하는 전투에 동원되어 무기 등을 쉽게 탈취한 뒤 학교와 군청 등을 불태우고 무주 방면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인 4월 24일에는 용담군 이동면 장전리를 습격하였고, 5월 8일에는 남원의 이문성 동북쪽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일본 헌병과 전투를 벌였으며, 8월에는 충청 북도의 영동·청산·옥천 등지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10월 30일에는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하여 불을 지른 뒤 일본인 3명을 납치하였다. 11월 이후에는 무주군 을 근거로 하여 금산·영동·옥천·상주·청주·보은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910년에는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의병의 숫자가 너무 적어 많은 수의 일본군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므로, 다시 덕유산으로 돌아와 힘을 기르면서 의병 활동을 계획하다 1911년 8월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대구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의 감옥으로 옮겨진 후인 1913년 2월 감옥에서 자결하였다.
무주 군민들은 문태수 의 항일 의병 활동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의하여 철거되었다.
1963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