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때 외척 세력인 민무구를 비롯한 4형제가 관련된 옥사.
민무구는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여흥 부원군 제의 맏아들이며, 태종비 원경 왕후 의 동생이다. 태종이 등극하자 민씨 형제들은 이러한 와중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인 부원군과 원경 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탄핵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권세와 부귀를 심하게 탐하였으며 권모 술수에 능하였고, 궁중에 들어가 종친에게 무례할 뿐 아니라 종친 간에 이간을 꾀하였다는 혐의로 많은 관련자들과 함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들이 권모 술수에 능한 것은 1400년 7월에 조준의 제거를 꾀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1407년 민무구 형제의 옥이 발생하였는데, 이 옥은 1406년 8월에 태종이 세자 양녕 대군에게 선위할 뜻을 표명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민무구 형제가 협유 집권을 꾀하였으며, 거기에 태종과 원경 왕후와의 불화도 작용하였다. 옥이 일어난 지 2일 후에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하고 4개월 후에 직첩을 빼앗았으며 여흥에 유배시켰다.
태종은 원경 왕후와 장인, 장모를 생각하여 생명을 보존해 줄 생각이었으나 유배 중에도 뉘우침이 없었고, 탄핵을 받을 행동을 자주 하여 그들의 옥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마침내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얼마 후 민무휼·민무회 두 형제가 누이인 원경 왕후가 병으로 눕게 되자 문안차 입궐하였다가, 세자인 양녕 대군에게 두 형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한 것이 정가에 전파되어 고문을 당한 뒤 먼 곳으로 쫓겨났다. 그 후 그들도 죽음을 당하고 처자들은 먼 지방에 안치되는 것으로 민씨 형제에 관한 옥사가 매듭지어졌다.
이 옥을 계기로 민씨의 4형제는 외척이 된 것이 오히려 화를 입어 희생되었는데,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건은 태종의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치 파동에 의한 희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옥사는 민씨 집안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고려의 옛 권문 세족 등의 관계로 얽혀서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격렬한 정치 파동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