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1910 러시아의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 지금의 고리키인 니주니노브고로트에서 태어났다. 발라키레프는 글린카와 다르고미슈스키의 뒤를 잇는 러시아 국민 음악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가난한 귀족 집안 출신인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10세 때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이미 작곡 을 시작하여 지방 극장 관현악단에서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16세에는 카잔 대학에 진학하여 수학을 전공하면서 18세가 되기 전까지 가곡·피아노곡·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하였다.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간 발라키레프는 글린카 를 만나 작곡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듣는 기회를 얻기도 하였다. 1857~1859년 사이에는 피아노 연주자로 자주 무대에 올랐고, 《러시아 주제에 의한 서곡》과 부수 음악 인 《리어왕》 등을 작곡하였다. 이 기간 중에 젊은 작곡 가 세자르 큐이와 무데스트 무소르크스키를 만나 음악적인 조언을 많이 해 주었으며, 1861년부터 이듬해까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알렉산드르 보로딘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발라키레프와 함께 ' 러시아 5인조'가 형성되었다. 한편 발라키레프는 1858년에 중병을 앓은 일이 있는데, 죽을 때까지 이 병의 후유증에 시달렸으며, 우울증으로 고통 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곤경에도 불구하고 1860년대에 발라키레프의 영향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1862년 로마킨이 설립한 자유 음악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헌신적인 음악 사업을 펼침으로써, 친독일파 작곡가· 비평가 그룹의 거점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유 음악원의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카프카즈 지방을 2차례 여행하였는데, 이 때 이 지방의 민속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가 엿보이게 된 것은 이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 피아노 환상곡 《이슬라메이》와 교향시 《타마라》이다. 발라키레프는 1867년에 러시아 음악 협회의 지휘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자유 음악원의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폭군적이고 융통성 없는 성격, 러시아 음악에 대한 투쟁적인 자세 등이 화근이 되어 많은 적을 만들었고, 그의 친구나 제자들까지도 그의 교습법에 반발하기에 이르러 모든 지위를 잃게 되었다. 1871~1876년 사이에는 음악계에서 고립되어 우울증이 더욱 악화된 생활을 하였다. 1881년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대신하여 자유 음악원 교장으로 재임명되었고, 1883~1894년 사이에는 궁정 예배당의 악장으로 일하였다. 한동안 손을 놓았던 작곡도 다시 시작하여 1905년에 피아노 소나타, 1908년에 교향곡 2번, 그리고 여러 편의 피아노 소품 및 가곡 등을 새로 작곡하였다. 19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마지막 10년 동안은 거의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발라키레프의 음악은 동양적인 요소와 슬라브 지방색이 강한 낭만적이고 개성적인 경향을 보이며, 러시아 민요의 화성화에도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앞에 거론한 작품 이외에 교향곡 2번 교향시 《러시아》 《러시아 민요집》 2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