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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 운동 (百濟復興運動)
백제가 멸망한 이후부터4년에 걸쳐 한 백제의 부흥 운동.
▣ 지식지도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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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과사전
백제가 멸망한 이후부터 4년에 걸쳐 한 백제의 부흥 운동. 주로 백제의 왕족과 신하, 장군들이 중심이 되어 벌였다.
 
백제의 부흥 운동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중의 '신라본기'의 태종 무열왕 7년조와 '백제본기'의 의자왕 20년조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660년(의자왕 20)에 5만의 군사를 거느린 신라의 김유신이 육지로 공격해 오고, 10만의 군사를 거느린 당나라의 소정방이 바다로 공격해 오자 백제의 의자왕은 수도인 사비성을 버리고 태자 효(孝)를 비롯한 다른 왕족들과 함께 지금의 공주인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사비성에는 둘째 왕자인 태(泰)가 남아 나당 연합군을 맞아 수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1만여 명의 군사를 잃은 후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더욱이 황산벌 싸움(지금의 연산 벌판)에서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유신의 군사와 용감하게 싸웠으나 끝내 패하자, 의자왕은 660년 7월에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 은 백제의 중앙 정부만을 쓰러뜨렸을 뿐이며 백제의 모든 것을 붕괴시키지는 못하였다. 백제의 중앙 정부가 무너진 후에도 오랫동안 지방의 많은 성에서는 백제인들의 저항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나라 군사들이 노략질을 하고 다니자 백성들 사이에는 부흥 운동에 대한 열망이 더욱 거세졌다.
 
부흥 운동의 초기 지도자는 흑치상지였다. 그는 먼저 임존성(지금의 예산과 대흥)을 거점으로 하여 열흘 만에 3만 명의 군사를 모아 소정방이 보낸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또한, 의자왕 의 사촌 형제인 복신은 승려인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흑치상지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백강(白江)과 사비성의 중간에 있는 주류성은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의 공격에 주력하여 오히려 병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주류성에 있던 백제의 부흥군은 끊임없이 사비성으로 쳐들어가 나당 연합군을 괴롭히자 사비성에 남아 있던 군사들까지 이들을 도왔다.
 
그 결과 661년 3월에는 백제의 옛성 중 20여 성을 회복하였다. 그러자 사비성에 고립되어 있던 당나라의 유인원과 신라의 김인태는 각각 본국으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신라 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으며, 당나라의 고종(高宗)도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에 임명하고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주어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으로 보냈다. 그런데 왕문도는 백제군을 공격하기 전에 갑자기 죽고 무열왕은 단독으로 위례성(지금의 논산)을 공격하였다. 무열왕의 맹렬한 공격으로 위례성이 신라에 함락되자 복신 이 탈환했던 나머지 20여 성도 신라에 넘어가게 되었다. 무열왕에게 패한 복신은 흑치상지가 있는 임진성으로 후퇴하여 다시 사비성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때 죽은 왕문도를 이어 당나라에서 유인궤(劉仁軌)를 보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복신은 유인궤와 사비성에 있는 유인원 의 군사들이 합쳐지는 막기 위해 다시 주류성으로 내려 왔다. 그는 백강 하류에 나무로 울타리를 세우고 사비성 을 공격하였다. 여기에 유인궤는 신라의 군사들과 함께 주류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부흥군이 이를 물리치자 신라 군사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유인궤는 사비성으로 돌아 갔다. 한편, 복신은 나당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661년 4월부터 일본에 있던 왕자 풍(豊)에게 사신을 보내어 귀국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신라는 그 해 6월에 무열왕이 죽고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신은 금강 동쪽의 여러 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이것은 사비성과 웅진성 에 있는 당나라의 군사들과 신라의 군사들이 연결되는 것을 막는 전법이었다. 그러자 사비성에 있던 당나라의 군사들은 신라에 웅진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군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로 향하던 신라의 군사는 방향을 백제로 돌려 지금의 대전 부근에 있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먼저 옹산성은 공격한 이유는 백제군이 사정성(沙井城)과 정형성(貞峴城) 등 대부분의 성을 탈환하여 사비성과 웅진성에 있는 나당 연합군의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때 백제군도 일본에서 구원군이 오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일본 구원군은 그 다음해인 662년 5월에 왕자 풍과 함께 왔다. 복신과 도침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풍이 170척의 배에 군사와 무기, 군량 등을 싣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백제군과 복신은 다시 금강 동쪽을 공격하여 신라가 북상하는 것을 막고 사비성 과 웅진성을 고립시켰다.
 
그러나 이 때부터 백제 부흥군의 지도층 사이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있었다. 복신이 도침과 의견이 엇갈리자 도침을 죽인 것이다. 이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복신은 '상잠 장군(霜岑將軍)'으로, 도침은 '영차 장군(領車將軍)'으로서 백제군을 지도하였다. 따라서 백제의 부흥 운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당나라는 손인사(孫仁師)에게 7,000명의 군사를 주어 사비성으로 파견하게 하였다.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기가 오른 당나라는 주류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라군도 백제로 출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다시 복신과 왕으로 추대한 풍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복신은 풍마저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하였다.
 
부흥 운동의 중심이었던 복신과 도침이 모두 죽고 나당 연합군 이 육지와 바다를 통해 총공격을 해 오자 당황한 백제군은 사기가 꺾여 미처 공격도 못 해 보고 거의 전멸하였다.
 
일본 구원군 역시 백강에서 대패하였다. 결국 풍은 고구려 로 도망가고 주류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이 나당 연합군 에게 점령당했다. 흑치상지 역시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다만 백제군이 북쪽의 거점으로 삼았던 임존성만을 지수신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이 점령당하자 임존성은 고립되고 말았다. 이에 당군은 직접 임존성을 공격하지 않고 항복한 백제군으로 하여금 임존성을 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663년 9월에 임존성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4년에 걸쳐 일어났던 백제의 부흥 운동은 끝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백제의 중앙 정부는 끝이 났지만 백제의 유민들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일념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한데 묶는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다. 668년에는 당나라를 상대로 전체가 하나가 되어 싸워 당나라의 군사를 몰아 내었다. 신라나 백제, 고구려 모두가 한 민족 이라는 민족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제 라는 나라는 망했지만 백제의 전통은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살아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부여의 은산(恩山) 지역에서는 백제의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복신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은산 별신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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