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서울 북쪽 고양군의 벽제관에서 일어난 명나라 군사와 왜군 사이의 싸움.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후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한 왜군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 평양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나라 원군에 대패하였다.
일본군 장수 고니시 등은 황해도로 진격한 다른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일단 서울로 후퇴한 후 전열을 정비한 후 고바야가와 등을 선봉으로 하여 다시 총력을 기울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이 때 명나라 군은 평양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삼아 개성까지 진격한 뒤, 1월 25일 서울로 남진하여 왜군의 주력 부대를 일거에 섬멸하고 도성 안으로 입성할 계획이었다.
이에 맞서 왜군의 선봉은 여석현에 진을 쳤다. 명나라의 선봉장인 부총병 사대수 등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주 부근을 점령해 있다가 바로 이 일본군 선봉과 맨 처음에 전투를 벌였으나 벽제역까지 후퇴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은 혜음령을 넘어 벽제관으로 군사를 몰아 망객현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명·왜 두 나라 군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고바야가와의 선봉대와 합세한 대규모의 왜군은 3대로 나누어 명나라군을 포위한 채 공격하였다. 화포의 지원 없이 다만 기병만으로 맞서 싸우던 명나라군은 결국 일본군으로부터 집중적인 조총 사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치밀한 준비없이 무모한 행동을 취하였던 이여송은 부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탈출하는 수치를 겪었다.
명나라군은 뒤늦게 도착한 부총병 양원이 거느린 화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일단 파주로 후퇴하였다가 개성으로 물러갔다.
명나라군은
평양성 전투에서 거둔 승리로 왜군을 얕잡아보아,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않고 서둘러 진격하다가 패전한 것이다.
명나라군 4만 3,000명, 일본군 7만 l,000명이 동원된 이 싸움에서 명나라군은 이비어·마천총 등 많은 전사자를 냈고, 이후 왜군과의 전투 의욕을 상실,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일본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