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초기인 1592년(선조 25) 9월 1일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의 배 100여 척을 격퇴시킨 전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다에서 계속하여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왜군의 본거지로 알려진 부산포를 빼앗아 왜군과 일본 본국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다.
1592년 8월 24일 전라 좌우도의 전선을 이끌고 나가서 중도(전라 남도 남해안 광해군 진월면 월길리에 위치한 섬)에서 원균에게 조선 수군을 정비하게 하고 8월 29일 낙동강 하구를 통해서 9월 1일 부산포로 진군하여 가던 중 부산 부근의 화준구미· 다대포·서평포· 절영도 등지에서 왜군의 배 24척을 무찌르면서 부산포 앞바다에 다다랐다. 우선 이순신은 부산포의 왜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는데 이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척으로 진을 치고 있었으며 왜군들은 언덕에서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이순신은 160여 척의 수군으로 하여금 장사진을 공격케 하였는데 우부장인 녹도만호 정운, 구선돌격대장 이언량, 전부장 이순신, 중위장 권준 등의 모든 장수들이 선봉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100여 척을 무찔렀다.
부산포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 외에 전사자 6명, 부상자 25명이었으며, 전투가 끝난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도달하여 삼도 수군의 진을 해체시키고 항구로 돌아왔다.
첫째날 (8월 29일(양력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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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포 해전 - 6척(대선 4척, 소선 2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사하구 장림동)
장림포는 형세가 좁고 정박하기 어려워, 다시 가덕도로 돌아와서 1박했다.
둘째날 (9월 1일(양력 10월 5일))
첫닭이 울 때 출발했다. 오전 8시경 몰운대(오늘날 다대포해수욕장역 서쪽)를 지날 무렵 큰 돌풍과 풍랑이 일어 함대 수습에 시간을 소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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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준구미 해전 - 5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다대포해수욕장역 동쪽)
• 다대포 해전 - 8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낫개역)
• 서평포 해전 - 9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송도해수욕장)
• 절영도 해전 - 2척을 침몰시켰다. (오늘날 영도구 남항동)
새벽에 출발하였으나 일본군과 4번의 해전을 치르느라 절영도 해전이 끝날 무렵에는 벌써 해가 저물었다.
• 초량목 해전 - 연합함대는 부산포를 목전에 두고 좁은 초량목(오늘날 남포역, 영도대교)을 통과하기 전 정찰선을 보내어 정찰을 하고 돌아온다. 이들을 추격해온 선봉 안택선 4척을 힘 안들이고 가볍게 격침시켰다. 정찰 결과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오늘날 부산항 제7부두)에 일본군 함대 470척이 줄지어 정박해 있으며, 그 위 해안선을 따라 높은 언덕에 진지를 구축해(오늘날 제7부두 뒤 우룡산 줄기인 '우암동도시숲' 언덕)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