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일대에 있는 백제의 무덤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부여군에는 8개의 읍과 면의 전역에 걸쳐 백제 시대의 고분들이 600기 정도 분포해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낮은 구릉이나 하천을 낀 평야 지대, 산성에서 가까운 산 중턱에 있고, 보통 한 곳에 수 기(基)에서 수십 기가 모여 있는데, 임천면 두곡리의 경우에는 100여 기의 고분들이 몰려 있다.
고분들은 북쪽으로는 백마강 건너편의 구릉 지대와 장암리, 성흥 산성 남쪽 일대, 동쪽의 능산리 등의 산성 주변에 분포해 있고, 염창리·현북리·상금리·정동리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규암면의 신리, 온산면의 신성리, 흥산면의 무정리·조현리·흥량리, 옥산면의 학산리·흥연리, 임천면의 옥곡리·가신리, 제암면의 상황리, 조촌면의 연화리·초평리·소사리·추앙리·용평리·세탑리·화암리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고분이 발견되고 있다.
구조는
돌방무덤이 대부분으로, 높이가 200m가 넘는 산 가까운 곳에는 할석이나 괴석을 이용하여 쌓았고 야산이나 구릉으로 평야와 가까운 지대에는 판석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다. 이것으로 무덤뿐만 아니라 무덤 주인들의 사회적 신분과 빈부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판석을 이용한 고분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고구려의 고분과 비슷한데, 한강 유역이나 공주의 중심 지역에서는 볼 수 없고 부여와 그 이남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돌방 무덤으로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의 6기 고분들로서, 1915~193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다. 천장과 각 벽을 편마암 판석 1매씩을 사용하여 평천장식으로 쌓았고 연도가 남벽의 중앙에 붙어 있으며, 끝이 벌어지는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의 고분과 비슷하다. 특히 벽화에서 이러한 영향을 뚜렷이 엿볼 수 있다. 그 예로 능산리 1 호분 네 벽의 돌 위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고구려 지역의 강서삼묘나 퉁거우 사신총과 상당히 유사하다. 이 같은 돌방 구조와 벽화의 존재는 고구려 문화와 백제 문화의 상관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돌방무덤 외에도 신리·능산리·중정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토광묘·호관묘, 그리고 화장용 뼈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백제 시대의 토광묘는 거의 노쇠한 암반층을 시체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보다 약간 넓게 파서 부장품 을 넣는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후대에는 암반층보다는 점토층을 많이 이용하였으며, 규모도 시체가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무덤들은 소사리와 신리에서 발견되었다. 화장묘는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삼국 시대에 쓰인 것으로 불교의 확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호관묘는 옹관묘와 같은 계통으로서 옹관묘가 변형하여 발전된 것이다.
이 무덤의 특징은 백제 토기 특유의 호를 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능산리·염창리·송국리·송학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된 호들은 처음부터 관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용기로 이용하다가 관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6세기 중엽에서 시작하여 약 1세기 동안 성행하다가 불교의 보급으로 화장묘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초기의 백제 무덤들이 석촌동 돌무지 무덤들과 같이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 비하여, 공주 시대를 거친 부여 시대의 고분들은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 불교적인 성격을 가진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여 거의 백제화된 고유의 모습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