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정조대 이후 17~18세기에 발흥한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 '이용후생지학(利用厚生之學)'이라고도 한다.
원래 북학이란 《맹자》 '등문공장구'에서 진량과 같은 지식인이 유학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워 온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즉 ' 북학'이란 미개한 민족이 중화 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그와 같이 문명한 나라가 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18세기
북학파들도 청나라 문명의 선진성을 직시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것을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북학을 하자는 주장을 북학론이라 하며, 북학을 한 학자들의 학문 내용과 현실 인식 지향성 등 사상 전반을 종합적으로 북학 사상 이라고 지칭한다.
청조의 학술은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개혁적인 실학자들의 학술 사상으로 이들이 내세운 개혁 사상은 민족 의식·민본 의식·현실 개혁 의식이 특징이다.
1778년에
박제가가 《맹자》에 나오는 '유학을 북쪽 중국에서 배워 온다'라는 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우자는 주장을 내세운 자신의 저서 제목을 《
북학의》라 지은 후, 북학은 청나라에 남아 있는 중화 의 선진 문물을 배운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인조대에 치욕스러운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에서는 오랑캐 청에 대해 복수하기 위해 북벌을 주장하고 '북벌대의론'을 내세워 청의 문물을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 대에 이르자 일부 학자들은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깨닫고, 오랑캐인 청나라의 문물이 바로 선진 중화 문화 라고 인정하고 그를 받아들이자는 '북학'의 주장을 폄으로써 커다란 사상적 전환을 모색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편 학자들로는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형수·
서유구 등이 있는데, 이들은 국제 질서와 조선 사회 내부의 변화에 발맞추어 민생을 이롭게 하는 이용후생의 실용적 학풍을 추구하였다.
북학론은
홍대용의 《
의산문답》과
박지원의 《
열하일기》, 그리고
박제가의 《
북학의》에서 구체화되었다. 이들이 주장한 북학론은 처음에는 청의 문물 가운데 이용할 만한 가치 있는 것만을 골라서 받아들이자는 선택적인 문물 수용론이었다. 처음에는 이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일었지만 당시의 사회 현실상 차츰 북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순조 이후로는 이를 토대로
정약용·
신작·
성해응 등 많은 학자들이 북학론의 개진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북학에 대해 연구하고, 청의 문물뿐만 아니라 청의 학술인 고증학과 예술까지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것은 청나라 학자들과 직접 교류한데다가
김정희·
권돈인 ·
조인영 등과 같은 정권을 담당하던 세도가들이 북학을 하면서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들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엄밀한 고증적 학문 방법과 동시에 문화 예술의 세련성을 추구하여,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워 민생 문제의 해결에 힘쓰던 전기의 북학의 성격을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청나라의 고증학풍이 유행하게 되고 추사 김정희의 새로운 서화 예술이 사회를 휩쓸면서 조선의 학풍과 문화도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이렇게 되자 전통 주자학의 권위가 크게 약해졌다. 또한 한나라 훈고학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새로 대두한 고증학과 기존의 정통 성리학 사이에 학문적 우위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아울러 북학론에서 한걸음 발전하여 청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그 선진성을 인식하면서 서양과 직접 접촉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나타났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은
박제가의 해외 통상론을 발전시켜
이규경·
최한기 등이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