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2월 1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소집되었던 자주적인 과도 정권의 수립을 목표로 서울에서 결성된 정치 단체. 광복 직후에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렬한 가운데 좌익과 우익의 합작을 통하여 범국민적인 과도 정권의 수립을 위하여
이승만 ·
김구 ·
김규식·
이시영 ·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결성하였다.
1946년 2월 1일 서울의 명동 천주교회에서 열린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정부에 대한 감사 결의, 경과 보고, 조직 대강의 채택, 군정 장관의 축사, 최고 정무 회의 설치 등에 이어서 의장에
홍진, 부의장에
최동오를 선출하였다.
2월 2일에 개최된 회의에서는 의장 홍진의 사회로 137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헌법·선거법 기초 위원 선거에 들어가
김병로의 제안으로 대한 민국 임시 헌장을 기준으로 법제 위원에게 수정·제정하게 하기로 하고 현 위원이나 그 방면의 권위자 중에서 선출하도록 인정하여 결정하였다.
그러나 좌익 진영은 여기에 참석하지 않고 이에 대응하여 '
민주주의 민족전선'이라는 또다른 단체를 결성하였다.
비상 국민 회의의 최고 정무 위원회는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청의 최고 자문 기관인 '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 의원'을 결성하였으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명목만 이어오던 중 1947년 2월 14일부터 2월 17일까지 제2차 전국 대의원 총회를 개최하여 국민 회의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또 28명으로 구성된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 의원의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
김규식을 뽑아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원될 때까지 군정청 자문 기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46년 12월 12일 군정청에 의해서 선출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이 개원되면서 남조선 민주 의원이 허물만 남게 되어 비상 국민 회의는 내부의 분쟁이 겹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유명 무실한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