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후기인 숙종 때의 실학자 박세당이 지은 유교 경전에 대한 주해서. 《통록》이라고도 한다. 필사본으로 1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책에는 《대학》, 2책에는 《중용》, 3책에는 《논어》, 4책과 5책에는 《맹자》 등 사서를 주해하고, 이어서 6책·7책·8책·9책에는 《상서》, 10책·11책·12책·13책·14책에는 《시경》을 주해하여 수록하였다.
박세당은 52세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65세가 되기까지 14년에 걸쳐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주역》도 주해할 계획이었으나 몸에 병을 얻는 바람에 《주역》에는 손을 대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사변록》에서 정통적인 주자의 해석을 부정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반론을 폈다. 특히, 사서의 주석에 주력하여 그 가운데서도 《대학》과 《중용》은 원전의 장구(글의 장과 귀)와 편차(편찬한 차례)까지 고치면서 주자의 학설에 반론을 펴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는 사서의 주석으로서 주자의 견해가 정통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박세당의 비판은 일대 물의를 빚어 조정과 민간의 큰 비방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는 유교에서 그 교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사문 난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기까지 하였다.
오늘날 박세당의 《사변록》을 평가해 볼 때, 그의 비판 은 형식상으로 이미 알고 있는 많은 특별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일반적인 원리를 추리해 내는 귀납적 방법과 유물이나 문헌을 상고하여 증거를 대어 설명하는 고증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당시의 성리학을 추구하던 학풍을 벗어나서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 실사 구시'의 학풍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윤휴나 박세당 과 같이 주자의 이론에 반대하여 독창적으로 경전을 해석 하게 된 것은, 주자의 해석이 6경(역경·시경· 서경· 춘추· 예기· 악기 또는 주례)의 근본 뜻에서 벗어나 일상적이면서도 긴요한 것을 소홀히함으로써 비현실적이 되었다는 비판 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실학의 발달에 선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 완사본(完寫本)은 박세당의 후손인 박계양에게 전해지며, 그 복사본이 서울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학 - 사변록에서
박세당은 고본 《대학》을 근거로 하여 《대학》에 대한 주자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첫째로 주자는 《대학》의 체계를 3 강령 8조목으로 본 것에 반하여, 박세당은 2 강령 8조목이라고 주장하였다. 주자가 제시한 3 강령은 '명명덕'(명덕을 밝히는 것)·'신민'(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지어지선'(지극한 선에 그치는 것)이다. 박세당은 '명명덕'의 다섯 조목(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과 '수신'의 세 조목(제가·치국·평천하)은 있지만 '지어지선'에 해당하는 조목은 보이지 않으므로 '지어지선'은 강령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합당하며, 오히려 '명명덕'과 '신민'의 효과로 나타나는 결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로 '물유 본말'(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과 '사유 종시'(일에는 시작할 때와 그칠 때가 있다)에 대하여, 주자는 '명명덕'의 ' 수기'(자기 몸을 닦음)를 본으로 보고 '신민'의 '치인'(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로 보았으며, '지지'(그칠 데를 아는 것)를 시작으로 보고 '능득'(얻을 수 있는 것)을 종말로 보았다. 박세당은 주자가 '명명덕'과 '신민'을 모두 '물(物)'로 본 것은 잘못이며, 8조목 가운데 천하· 국가·몸·마음 등은 '물'이지만 평(平)·치(治)·제(齊)·수(修) 등은 '사(事)'이므로, 근본과 말단을 구분할 수 없고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로 ' 격물 치지'(실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에 대하여도, 주자는 '격'은 이르는 것이고 '물'은 '사'와 같으므로 '격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자신의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박세당은 주자의 해석대로라면 '격물'이라는 말은 결국 '지물'이나 ' 지사'가 되는데, 이는 말이 안 되며, '격'이라는 글자에는 '궁구하여 이른다'는 뜻도 없으므로 '물'과 '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격'은 '칙'(법칙)이며 '정'(바로잡는 것)으로 보아서 '격물'은 사물의 바른 법칙을 일상 생활에서 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넷째로 '물격 이후 지지'에 대하여, 주자는 '물격'을 물리의 극처가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고 보고, '지지'는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고 보아, '물격 이후 지지'라는 것은 천하의 이치를 모두 알고 나면 뜻이 성실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박세당은 천하의 이치를 모두 파악하는 경지는 학문을 모두 마친 다음에 얻어지는 것이지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여 주자의 해석을 부정하였다.
중용 - 사변록에서
첫째로 주자는 ' 중용'에서 '용'의 의미를 '평상'이라고 본 것에 반하여, 박세당은 '항상'이나 ' 항구'로 보았다. 둘째로 '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고 한다'에 대하여 주자는 '명'을 '영'(令)이라고 해석하였는데, 박세당은 '수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셋째로 주자는 '성'에 대하여 '성'은 곧 '이'(理)라는 '성 즉 리'를 주장하였지만, 박세당은 '이'가 마음에 밝은 것이 '성'이기 때문에 하늘 에서는 '이'일지라도 사람에게는 '성'이 되므로 '성'과 '이'를 혼동하여 사용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넷째로 주자 는 '사람과 물이 각각 그 자연스러운 성을 따르는 것이 도(道)가 된다'고 하였는데, 박세당은 사람은 가르칠 수 있으나 '물'은 가르칠 수 없고, 사람은 '도'를 알 수 있으나 '물'은 '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에서 '물'을 제외시켰다. 이 밖에도 박세당은 '비은', '격치', '인물성' 등에 대해서도 주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맹자 - 사변록에서
주자는 《맹자》에서 제시된 경제 정책을 이상적이지만 실천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한 데 반하여, 박세당은 이를 실천하는 것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주자는 '인의(仁義)의 성'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지만, 박세당은 그것은 행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