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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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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이탈리아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며 종교 개혁가.
▣ 백과사전
1452~1498 이탈리아 의 도미니크회의 수도사이며 종교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는 니콜로 사보나롤라와 엘레나 보나코르시의 아들로 북이탈리아의 페라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의사이면서 도덕과 신앙에 엄격하였던 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는 중세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인본주의적인 이교 사상을 배격하고, 이탈리아에 만연된 부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고위 성직자들 자신의 부패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475년 4월 24일에 볼로냐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가입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479년에는 페라라로 돌아와 안젤라 수녀원에서 성서를 가르치며, 성서와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 1482년에는 피렌체로 파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산마르코 수녀원의 강사가 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어느날 갑자기 계시를 받고 예언적인 색채를 띠는 설교를 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1485년과 1486년의 사순절에는 "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며 벌을 받은 다음에야 쇄신될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487년에는 볼로냐에서 일반 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였고, 퇴직한 후에는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설교하였다. 한편, 그가 피렌체 공화국 을 통치하던 메디치가를 신랄하게 비판하자,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를 1490년에 피렌체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서도 정부의 폭정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다. 1491년에는 피렌체의 성마르코 수도원장이 되어 스스로 금욕주의를 실천하면서, 교회의 타락과 사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교회 혁신을 주장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솔직하면서도 예언자적 언사를 사용함으로써 많은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 지도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안 로렌초는 그의 비판을 멈추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그의 설교는 나날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로렌초는 그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였다. 그는 ' 하느님의 노여움'에 의하여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를 침략하여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이것이 1494년 적중하였다. 그리하여 메디치가는 추방되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사건을 신이 내린 벌로 간주하였으므로, 프랑스 사람들은 이와 결탁하여 민주 정치와 신재 정치 (神裁政治)를 혼합한 헌법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려고 하였는데, 사보나롤라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협상하여 회유함으로써 피렌체에 민주 정부를 도입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피렌체에 크리스트교 공화국을 세워서 이탈리아 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의도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피렌체는 새롭게 변화되었지만, 피렌체의 내부에는 그의 비타협적인 신정 정치와 친프랑스 정책, 교황 비판 등에 의하여 '아라비아티'라는 반대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친프랑스 정책에 반대하며 프랑스에 맞서는 신성 동맹에 가담한 밀라노의 공작과 교황은, 피렌체 가 이 동맹에 가입하기를 원하였지만 사보나롤라가 가입을 거부하였으므로, 사보나롤라에게 볼로냐로 갈 것을 명령하고 순종하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에서 파문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사보나롤라가 이에 반박하자 교황은 사보나롤라 의 설교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몇 달 후 이 설교 금지령은 철회되었다. 그는 교황청을 비판하는 설교를 함으로써 교황을 화나게 하였지만 신학자 협의회가 그의 설교에서 오류를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계속 설교를 할 수 있었고, 그의 권위도 세우게 되었다. 1497년 사육제(謝肉祭)에서 행정 당국은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음란한 그림·카드·도박용 탁자 등) 및 서적 등 헛된 것들을 불태웠는데, 교회의 개혁에 찬성하던 사람들도 이른바 '허영의 소각'과 같은 과격한 방법에는 불만을 나타내었다. 그 이후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되면서 반대 세력이 우세해지고, 아라비아티는 사보나롤라 와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를 이용하여 그에 대한 파문장을 얻어 냈다. 1498년 사보나롤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파문장이 무효라고 주장하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는 "불의 심판에 의하여 누가 옳은지 가려 내자."고 주장하였는데, 다혈질인 사보나롤라의 제자가 이를 수락하였다. 실제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가 이 심판의 자리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사보나롤라측이 승리하였지만, 사보나롤라 의 기적을 기대하던 시민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다. 그 다음날 아라비아타당은 폭동을 일으켜 수도원을 습격하였고 사보나롤라와 2명의 제자가 체포되었다. 그들은 교황청 과 결탁하여 형식적인 종교 재판을 행한 후에 이단이라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보나롤라를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사보나롤라는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그에 대항하였으므로 어떤 점에서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그는 철저한 가톨릭 교도이자 토마스주의자로서 로마 교황청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주요 저서로는 크리스트교 변증학을 해설한 《십자가의 승리》, 실현된 환상과 예언에 대하여 서술한 《계시 목록》 등이 있고, 사람들이 받아 적은 설교가 몇 편 전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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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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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8년 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