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서전 서숙(瑞甸書塾)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서전 서숙 (瑞甸書塾)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1906년 세워진 항일 민족 교육 기관.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서전 서숙 (瑞甸書塾) 1937년 이동녕 이상설 이위종 이준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신흥 무관 학교 을사늑약 중·일 전쟁 헤이그 특사 사건
▣ 백과사전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1906년 세워진 항일 민족 교육 기관.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사실상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이상설 · 이동녕·정순만·박무림 등은 만주로 망명해 그 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었다. 그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 의식을 키우면 나아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각지에 학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1906년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용정에 서전 서숙을 세웠다. 당시 이 곳에는 망명한 학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또 우리 나라와 거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민족 교육을 실시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제1대 숙장은 이상설이 맡았으며,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책임졌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 등이 활약했다. 학교 건물은 천주교도인 최병익의 집을 사들여 수업하는 데 알맞도록 고쳐 사용했으며, 학교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돈은 모두 이상설이 내놓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무료로 공부할 수 있었다.
 
처음 학교가 문을 열 당시에는 전교생이 22명에 불과해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교육 과목으로는 역사·지리· 수학·정치학·국제 공법· 헌법 등이 포함된 신학문이었는데, 어떠한 과목이건 모두 항일 독립 의식을 키우는 데 중심을 두고 수업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상설 등은 틈 나는 대로 주변 지역을 돌면서 민족 교육이 필요한 이유와 서전 서숙을 만든 이유 등을 설명했는데, 그 결과 각지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처음 2개 반이던 학급 수가 3개 반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 의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후 학교는 운영에 필요한 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으며, 더욱이 이상설이 일제의 방해 때문에 용정으로 되돌아 올 수 없게 되자 위기를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7월에는 이 곳에 일제 통감부의 간도 출장소가 들어서 학교의 활동에 대한 일제의 방해와 감시가 심해지면서 문을 닫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일제는 항일 의식을 키우는 민족 교육을 방해하고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간도 보통 학교를 세우고 서전 서숙에 대해서도 기부금을 낼 뜻을 비쳤으나 이들의 돈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문을 닫았다.
 
용정을 떠난 서전 서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훈춘[琿春]으로 가 고등반 학생들만으로 수업을 계속한 후 이들에 대한 졸업식을 끝으로 완전히 문을 닫았다. 겨우 1년 만에 닥친 폐교였으나 서전 서숙의 설립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교육은 이후 중국 각지와 한반도에서 실시된 민족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 운동에도 적지 않은 바람을 일으켜 1910년대 이후 독립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이상설 (4) 백과 이동녕 (3) 백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 (2) 백과 이동휘 (2) 백과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카달로그 작업
관련 의견 모두 보기
자유 의견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관련 동영상
▣ 참조정보
없 음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