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탄생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조선 의 미술인들은 각지에 미술 학원을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쳐 미술인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인·서예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발표할 기회는 많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러한 기회를 만들어 줄 협회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조선에 협회를 만들어 미술계를 주도하려는 뜻을 보이자 조선인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협회를 만들고자 하는 기운이 크게 일었다.
협회 창설을 이끈
고희동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경성 미술원을 만든
윤영기, 서화 미술회를 조직한
김규진 등을 비롯해
안중식·
오세창·
조석진·
강진희·
정학수·
정대유·
강필주·
현채·
이도영 등 미술인·서예인들과 힘을 합쳐 협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918년 6월 16일 김진옥의 집에 모인 이들은 협회를 설립하고 제1대 회장에
안중식을, 총무에
고희동을, 간사에
김균정을 뽑았다. 이들은 '서화계 전체의 발전을 꾀하고 동양화· 서양화 등을 연구하며,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데 노력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미술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의 회칙을 정하고 회원을 받아들여 그들을 중심으로 한 활동을 하되, 회원은 정회원·특별 회원· 명예 회원으로 구분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직접 활동을 하는 서화가만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으며 특별 회원과 명예 회원으로는 일반인들을 받았다.
일본인은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조선 총독부의 간섭을 피하고 후원금을 받아낼 목적으로 친일파로서 높은 직책에 앉아 있던 김윤식을 명예 부총재에 앉히고 이완용 · 민병석· 김가진·박기양 등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첫 서화 협회전은 원래 1919년 봄에 열 계획이었으나 3·1 운동이 일어나 열지 못하고 2년 뒤인 1921년 4월 1~3일에야 중앙 학교 강당에서 열 수 있었다. 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전으로 의의가 깊은 전람회였을 뿐만 아니라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최우세 등 신인들이 많이 등장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제2회 서화 협회전이 1922년 3월 보성 학교 강당에서 개최되는 등 전람회는 매년 열리는 행사로 굳어졌다.
그러나 서화 협회의 활발한 활동에 자극을 받은 일제가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주도하는 국가적인 규모의 조선 미술 전람회(선전)를 만들고 활동에 들어가자 서화 협회의 전람회는 차차 빛을 잃기 시작했다. 많은 작가들이 훨씬 규모가 큰 선전에 작품을 내느라 서화 협회의 전람회에는 참가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고, 따라서 회원 중에서는 협회를 탈퇴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궁여지책으로 1931년에 열린 제11회 서화 협회전에서는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심사해 상을 주는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이 때 등장한 작가는 김기창·한유동· 장우성· 이응로 등이다.
서화 협회는 전람회 외에도 미술 학원을 세워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였는데, 1923년 11월 서울 동숭동에 서화 학원을 열고 동양화· 서양화· 서예로 학과를 나누어 학생들을 모집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많이 모이지 않고 운영비도 바닥나게 되자 시작한 지 2년 만인 1925년 문을 닫았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 협회보》를 펴내기도 했지만, 이 역시 1922년 3월 단 2호만을 펴낸 상태에서 폐간되었다.
선전과의 경쟁 속에서 초라해져만 가던 서화 협회전은 비용의 부족과 조선 총독부의 명령으로 인해 1936년 제15회 서화 협회전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서화 협회는 애초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미술, 근대적인 미술, 민족적인 미술을 추구했으나 민족 의식이 충만한 근대적인 미술의 달성에는 실패했다는 평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