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 자리한 민속 마을. 1984년에 중요 민속 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성읍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해발 125m의 비교적 높은 분지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며, 제주시에서는 남동쪽으로 34㎞, 표선리에서 북쪽으로 8.8㎞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410년(태종 10)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뒤 1914년 군현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정의현의 소재지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읍성 가운데 하나이다.
풍수 지리설에서는 이 마을이 제주도의 중심인 한라산을 조산으로 삼고, 북쪽의 영주산은 진산으로, 남쪽 들판의 남산봉은 안산 으로 삼았으며, 천미천이 성읍 마을을 반달꼴로 감싸며 흐르고, 남산봉 남쪽으로는 수구가 열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형국은 앞·뒤, 좌·우가 대칭형으로 장군 이 마주 앉아 있는 형상의 장군 대좌형이면서, 사람과 물자를 배에 가득 싣고 떠나려고 하는 행주형으로 이런 형태의 땅은 방어에 유리하고 사람과 물자가 풍부하다고 믿었다.
성읍 마을은 관아를 중심으로 동서길과 남북로가 교차하는데, 이를 기본으로 하여 성곽 밖은 둥근고리꼴의 길을, 성곽 안에는 한글의 '우' 자꼴 길을 만들었다. 여기서 '우' 자의 'ㅇ'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관아를 두었고, 그 아래 'ㅡ'는 동서를 이어 주는 길이 되었으며, 'ㅣ'는 남문로에 나 있다. 이러한 형태의 도로를 바탕으로 일반 가옥이 배치되고 샛길이 만들어졌는데, 특이한 것은 길들이 모두 구부러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똑바른 길은 충파(衝破)라 하여 좋지 않다는 해석에 의해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1826년(순조 26) 성읍 마을은 성 안에 큰 화재가 일어나 80여 동이 불탔으며, 1948년 4·3 사태 때에는 서문 밖의 민가가 대부분 불타 버려 많은 건물들이 그 이름만 기록에 남아 있을 뿐 그 규모나 형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현재는 19세기 초의 건물을 중심으로 읍성을 둘러쌌던 성곽과 정의현청이었던 일관헌, 명륜당과 대성전, 15개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는 정의 향교 등이 남아 있다.
또한 돌과 진흙으로 벽을 쌓고 초가로 지붕을 이은 300여 채의 민가를 비롯하여 1423년에 세워졌던 옛 정의 성터, 12기의 돌하르방, 연자매 등이 있다. 동헌 앞의 공문 동산·벌원 방죽·동문 앞·노다리 방죽 등은 길이 만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옛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던 곳이다.
성읍 마을의 건축물들은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과 구조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민가의 경우 평면 구조는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2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ㅡ자 겹집인데, 배치 방식은 二자 모양과 ㄱ자와 ㄴ자 등 모로 앉은 두 가지가 있으며, 이 가운데 모로 앉은 방식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안거리의 경우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많다.
마을에는 중요 민속 자료 제68호로 지정된 조일훈 가옥, 제69호인 고평오 가옥, 제70호인 이영숙 가옥, 제71호인 한봉일 가옥, 제72호인 고상은 가옥 등이 옛 민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천연 기념물로는 제161호인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마을 한복판에 서 있으며, 수령은 1,000여 년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정의 향교·일관헌· 녹나무· 돌하르방· 초가 등이 민속 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고유한 생활 풍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안할망당·산신당·상궁알당 등 무속 신앙처와 '걸궁'과 같은 특이한 민요, 향토 민속주인 오메기술 등이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