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인 1309 ~ 1377년에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던 로마 교황청.
이 시기에 교황청 이 로마에 있지 않고 프랑스에 있던 것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1303년에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의 고문관 G. 드 노가레가 군사 1,600명을 이끌고 로마시의 남동쪽에 있는 아나니에서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를 습격하여 납치하였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교황권의 왕권 강화를 꾀한 로마 교황이다. 이 사건을
아나니 사건이라고 하는데, 필리프 4세가 교회에 과세를 물리고 금은을 국외로 내가는 것을 금지하며 교회의 재판권을 침해하려는 것에 대하여 보니파키우스 8세가 강력하게 비난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사건이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2일 후 구출되었으나, 심한 충격을 받고 1303년 10월 11일에 갑자기 죽었다.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계기가 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은 후 추기경단이 분열됨으로써 교황의 선거가 어렵게 되고, 아나니 사건을 처리하는 일에 프랑스 왕이 간섭하였으며, 이탈리아 교황령 에서는 무정부 상태가 발생한 것 등의 정치적 상황에서 교황청이 프랑스로 옮겨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로마와 프랑스가 서로 맞서서 겨루고 있는 상태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보르도 주교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의 파벌주의로 고민하다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압력으로 로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1309년에 교황청을 남프랑스에 있는 프로방스 백작령 안의 아비뇽으로 옮겼다. 클레멘스 5세의 뒤를 이어 요한 22세, 베네딕트 12세, 클레멘스 6세의 3대가 교황의 자리에 있는 동안 대궁전과 시의 성벽이 건설되었다. 1348년에 아비뇽은 교황이 직접 관리하는 교황의 소유지가 되었다.
아비뇽 시대의 교황은 7명으로 모두 프랑스 사람이었고, 그 시기의 추기경은 134명으로 그 가운데 111명이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프랑스의 압력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추기경회가 교회 행정에서 맡은 역할이 좀더 강력하여졌고, 이 밖의 사법· 재정 분야에서도 개혁이 일어나 내부 기구가 정돈되고 충실해짐으로써 중앙 집권 을 이루게 되었으며, 남프랑스의 물질적 번영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우스 11세가 교황 으로 있던 시기에는 서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이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있는 것에 대한 반대는 끊임없이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1341년에 계관 시인의 영예를 받은 F. 페트라르카(1304~1374)와 이탈리아 도미니코회의 수녀이자 성녀인 카타리나(1347~1380) 등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특히 영국과 독일의 반대는 매우 심하였다. 이러한 일은 교황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재력과 군사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1367 ~ 1370년에 일시적으로 로마로 복귀하였으며, 1377년에 그레오리우스 11세는 교황청을 완전히 로마로 옮겼다.
그로 인하여 아비뇽의 교황 자리가 비게 되자 추기경단에서는 교황을 따로 선출하여 그 자리에 앉혔다. 이러한 추기경단의 분열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때부터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인 교황이 로마와 대립하는 대립 교황이 되풀이되어 선출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클레멘스 7세부터 베네딕트 13세까지 제2차 아비뇽 시대를 불러 오게 되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일반적으로 아비뇽 유수로 알려졌다.
대분열 이후 추기경들 사이에서 교회의 전체 회의에서 결정되는 권한이 교황의 권한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주장이 일어남으로써 이 시기를 교황권의 쇠퇴기로 평가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중앙 집권적 형태를 갖춘 근대적 교회가 처음 생겨난 시기로 재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