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이후 조선 초기에 걸친 악장과 속요를 모은 시가집. 《국조사장(國朝詞章)》 《국조악장(國朝樂章)》이라고도 한다. 엮은이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종, 명종 연간에 박준(朴浚)이 엮었다고도 한다.
「처용가」 「한림별곡」 「쌍화점」 등 고려 때 작품 13편, 「오륜가」 「연형제곡」 등 조선 때 작품 13편으로 모두 26편의 시가가 실려 있어서 고시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
아악가사
「풍운뢰우제」
풍운뢰우제는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여 풍사(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 신에 대한 제사로 기원은 비교적 오래되었다. 풍운뢰우악장은 모두 5편인데, 이 가운데 초헌 3편은 변계량이 지었다.
「사직제」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제사로 중국 전국시대 이후 사(社)와 직(稷)을 하나로 합하여 토지와 곡식을 관장하는 지신(地神)으로 받들면서 천자가 주재하는 국가적 제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사직제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 1395년(태조4) 사직단의 설치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제례를 봉행하였다. 악장은 3편이다.
「선농」
신농(神農)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선잠제」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황제(黃帝)의 비인 서릉씨(舒陵氏 혹은 西陵氏)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선농과 선잠은 농경문화의 시작과 함께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선농∙선잠제는 1424년(세종 6)에 악장 제작과 함께 올렸으며, 선농과 선잠악장은 각 3편이다.
「우사제」
기우제로 정기∙비정기적 제사이며 농경과 관련 있는 것으로 기원은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1)에 우사제를 지냈으며, 악장 8편은 세종 때 제정되었다.
「둑제」 (군례)
군례인 군기제로 조선시대 들어와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악장은 정도전이 지은 납씨가와 정동방곡을 사용하였다.
「대보단제」
명나라 태조∙신종∙의종에 대한 제사로 1704년(숙종 30)에는 신종만 모셨으나, 1749년(영조 25)부터는 태조와 의종을 합사하였다. 신종 제례 악장은 송상기가 제작하였으며, 나머지 부분은 영조 때 이루어졌다. 악장은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속악가사
「종묘영년전악장」
종묘영녕전제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들에 대한 제사이다.
「비궁악장」
경모궁 제례는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사당인 경모궁을 짓고 올린 제사를 말한다.
「무안왕묘악장」
관왕묘 제례는 관우에 대한 제사이다. 이때 사용하는 음악을 무묘곡 혹은 무안왕묘제악이라고도 한다.
가사
「여민락」
1445년(세종 27)에 제작된 「용비어천가」 가운데 1,2,3,4 및 125장의 한문 가사에 얹어 부르던 곡으로 1447년(세종 29)부터 각종 연향에서 불려졌으며, 악공의 취재 과목으로 지정된 후 전승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보허자」
고려시대에 도입된 송 사악 계통의 곡 가운데 하나인 「오양선(五羊仙)」 정재(呈才)의 가사로 「보허사」, 「장춘불로지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감군은」
작자와 구체적인 창작 시기를 알 수 없는 4연으로 이루어진 국문시가이다. 선초인 1442년 이전에 제작되어 궁중의 연향에서 사용되었다. 이후 이 노래는 궁중에서는 물론 『양금신보』(1610)에 실리는 계기를 통해 전국적으로 소통되었다.
「정석가」
6연 11분절로 된 국문시가. 고려속요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시용향악보』『금합자보』(1561) 등에 실려궁중과 민간의 각종 연향에서 불렸다.
「청산별곡」
8연으로 된 국문시가. 고려속요로, 고려 고종 때 형성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납씨가」, 「휴명」 등의 악곡에 영향을 주면서 『시용향악보』를 통해 전승을 멈추지 않았다.
「서경별곡」
3연 13분절로 된 국문시가. 고려시대에 형성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정동방곡」, 「영관」 등의 악곡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시용향악보』에 등재되는 등 전승을 계속하였다.
「사모곡」
고려시대에 궁중 속악곡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악보에 실려 전하면서 궁중 연향곡으로 사용되었다. 가사 소재 국문시가 가운데 비교적 민요적 성격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능엄찬」과 「영산회상」
찬불가적 성격을 지닌 한시체의 노래. 궁중 불교 의식에 사용된 악장으로 세조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회상」은 「학연화대처용」 정재에서 불려 불교 의식 외에 궁중 연향에서도 사용되고, 이후 「영산회상」은 중종 때 「수만년」으로 개사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원래의 가사로 전승되었다.
「쌍화점」
4연으로 된 국문시가. 고려 충렬왕 25년에 이루어진 궁중 연향곡으로 조선시대 궁중과 민간에서 향유하였다.
「이상곡」
음악적 분장이 없는 단형의 국문시가. 고려 충숙왕대 채홍철에 의해 제작된 노래로, 조선시대 이르러 악공 취재과목으로 채택되는 등 그 영향력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음을 『속대전』, 『대전회통』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시리」
4연의 국문시가로 이별의 정서를 비교적 소박하게 노래하고 있다. 형성은 고려시대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시용향악보』(「귀호곡」)에 오르면서 궁중 연향곡으로 전승을 계속하였다.
「유림가」와 「신도가」
이 두 노래는 조선 창업의 위업을 송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공식적인 제향에 올려 사용되었다. 「유림가」는 조선 초기 유생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창작 시기와 작자층을 알 수 없고 형식은 경기체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비해 「신도가」는 태조 3년(1394)경 정도전이 지은 것으로 형식이 비교적 자유로운 단연체로 되어 있다.
「풍입송」과 「야심사」
「풍입송」과 「야심사」는 고려시대부터 속악가사로 사용된 한시체의 노래이다. 고려시대에 형성되어 고려 궁중의 군신 연회의 파연곡으로 사용.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 두 노래는 궁중 연향에서 사용되었으며, 빈례에서도 사용 되었다.
「한림별곡」
경기체가의 효시 작품으로 8연으로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의 궁중 연향에서 불린 노래로 주로 허참∙면신례에서 불렸다.
「처용가」
「처용가」의 기원은 신라 헌강왕대까지 소급할 수 있지만 가사 소재 「처용가」의 성립은 고려 충렬왕대로 볼 수 있다. 이 노래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봉황음」을 파생시키기도 하였으며, 정재의 창사로 궁중 연향에서의 영향력을 지속시켰다.
「어부가」
12연으로 된 칠언 절구의 국문현토체 시가. 고려 공민왕대 여러 한시를 집구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시대에 들어와 궁중 연향과 사신연에서 불림. 이 노래는 주로 선유희∙선유락정재를 통해 전승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면 「선유락」 정재가 각종 진연에서 활발히 공연되면서 동반 전승되었다.
「만전춘별사」
6연으로 된 국문시가. 고려에 형성된 노래로 조선시대 세종∙세조 대에 이르러 「봉황음」「혁정」 등의 악곡에 영향을 주면서 전승을 계속하였다.
「화산별곡」
8연으로 「한림별곡」의 형식적 틀을 그대로 이은 것으로 보인다. 1425년(세종 7) 변계량이 지은 노래로 제작 초기에는 연향에서 사용되지 못하다가 세종 사후부터 궁중에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오륜가」와 「연형제곡」
두 노래 모두 선초에 제작된 경기체가로 궁중의 연향에서 사용되었다.
「상대별곡
「상대별곡」은 사헌부의 모습, 집무, 광경, 일과 후의 잔치 등을 5연으로 노래한 경기체가이다. 1400년(정종 2)에 권근이 지은 노래로 사헌부 연회에서 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