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제10대 왕인 연산군 이 즉위한 1494년 12월 25일부터 폐위된 1506년 9월 2일까지의 실록. 활자본으로 63권 4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산군일기》는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06년(중종 1) 11월에 편찬을 시작하였는데, 폐위된 왕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에 실록청이 아닌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면서 편찬 사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507년 1월 김감이 대신 박경 암살 사건에 관련되어 유배되자 편찬 작업은 일시 중단되었고, 곧 대제학
신용개가 감춘추관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편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공정한 편찬을 위해서는 연산군에게 사랑을 받았던 인물을 기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오자 다시 편찬관을 바꿔 1507년(중종 2) 6월 중종 반정의 주요 인물이었던
성희안이 총재관으로, 그 아래 도청당상 2명, 각방당상 4명, 색승지 1명을 다시 임명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편찬 작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다른 실록과는 달리 이 일기에서는 끝에 편찬자의 명단이 나타나 있지 않아 구체적인 편찬자의 이름을 알 수 없었는데, 일기의 편찬에 참여한 권벌의 저서인 《일기세초지도》가 1509년 안동 권씨 집안에서 발견됨으로써 그 면면을 밝혀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감춘추관사 성희안 외에 지춘추관사는 성세명·신용개 등 6명으로, 동지춘추관사는 조계상·이유청 등 8명으로 되어 있어 편찬 책임자가 중간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찬관으로 강경서·이세인 등 5명이, 편수관으로 유희저·김근사· 김안국 등 24명이, 기주관으로 이현보·이사균 등 7명이, 기사관으로 이말· 성세창 등 16명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연산군일기》는 이 편찬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분위기로 인해 편찬관이 자주 바뀌는 등 여느 실록과는 달리 편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연산군대에 김일손의 사초 사건으로 인해 일어난 무오사화 이후 사관 이 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에 연산군대의 기록을 제대로 적은 사초가 거의 남아 있지 못하였고, 그런 사초마저도 이 일기의 편찬 시기가 중종 반정 초기의 불안한 정국이었으므로, 선뜻 제출하려는 사관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또한 일기를 편찬하는 인물 가운데 중종 반정에 참여한 관리들이 많아 공정한 시각으로 사실을 기술하지 못하였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09년(중종 4) 9월 《연산군일기》는 마침내 완성되어 실록 봉안에 따른 의식을 간소하게 치른 뒤 외사고에 봉안되었다. 비록 이 일기는 봉안이나 관리면에 있어서는 왕의 실록과 차별을 두었지만, 그 내용이나 체재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기술 되었다.
내용면에서는 우선 연산군대의 정치가 비정상적이었고, 또한 이러한 상황을 올바르게 기록한 사초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부실한데 당대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다른 실록과는 달리 갑자사화 이전까지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그리고 갑자사화 이후부터는 두 사화 뒤에 내려진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산군일기》에 있어 특이한 것은 왕의 시문과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다수 실려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