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던 연작시.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으로 보성 고등 보통 학교를 거쳐 경성 고등 학교 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공학도 출신이다. 1931년에 《조선과 건축》지에 《이상한 가역 반응》 《파편의 경치》라는 시를 발표하였고 서양화를 출품하는 등 건축과 예술을 연결지은 작품 활동을 한 천재적인 작가이다.
《오감도》와 더불어, 1936년에 《조광》지에 《날개》라는 자전적인 소설을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으며, 여러 작품을 통해서 지적인 풍자와 상징적인 수법을 사용하였다. 당시 지쳐 있는 듯한 인텔리 계층의 신경과 이로 인한 자의식의 분열됨을 심리주의적인 경향에서 추구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를 보는 시각은 천재 또는 정신 이상자로 양분되었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시 《건축 무한 육면각체》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였으며, 구인회의 동인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한때 다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오랜 지병인 폐결핵과 무질서하고 곤궁한 생활 속에서 헤매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하였다. 일본에서 불온 사상 혐의를 받고 체포된 뒤에 병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병세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28세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가 발표한 오감도는 그의 선배인
이태준을 통해서 연재되었는데, 신문지상을 통해서 발표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결국은 연재를 중지하게 되었다. 이상은 분노한 독자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를 연재하려 하였으나, 아무도 이해 못 하는 시를 계속 연재해 줄 신문사는 없었다.
오감도는 조감도의 조(鳥) 대신에 까마귀를 의미하는 오(烏) 자를 사용함으로써, 제목에서부터 풍자적인 성향이 배어 있다.
그는 이 제1호에서부터 제15호라고 순서만을 기록하였을 뿐이고, 제목을 붙인 것은 제8호의 《해부》와 제9호의 《총구》, 제10호의 《나비》뿐이었다. 연작시의 제목과 내용면에서 기존에 행해지던 형식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의 의식이 흐르는 대로 작품을 이어 나감으로써, 인습에 저항함과 동시에 새로운 질서 체계의 확립을 모색하였다.
제1호에서 13인의 아이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을 담았다.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고 낭만적인 요소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으며, 오로지 혼란스러움과 공포와 불안감만이 내재되어 독자들을 자극한다. 시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려 하던 당시의 독자들에게 오감도의 시어와 형식은 매우 난해하면서도, 피하고 싶은 어두움이 있었다. 시대적으로도 암울한 일제 강점기였고, 발표된 시도 여전히 희망이 없어 보이는 말들로 가득하자 독자들은 예술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상이 오감도를 통하여 추구하려 하였던 것이 무엇인지, 13이라는 숫자는 무얼 의미하는지는 여러 가지 주장이 얽히어 있다. 그러나 형식면에서나 내용면에서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났으며, 결국 시인은 오감도를 통하여 현대인의 병폐를 드러내려 하였다는 것은 일치된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