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나라 말기 1899년 11월 2일부터 1901년 9월 7일까지 산둥 지방, 화베이 지역에서 의화단(義和團)이 일으킨 외세 배척 운동이다. 북청 사변(北淸事變)이라고도 한다. 또 의화단을 주먹을 쓰는 비적들이라는 의미의 ‘권비(拳匪)’나 ‘단비(團匪)’로 지칭하였는데, 따라서 의화단 운동을 ‘의화단의 난,’ ‘권비(拳匪)의 난,’ ‘단비(團匪)의 난’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 난은 의화단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으로, 외척 배격 사상이 가장 큰 배경이다. 의화단이란 청나라 중기부터 세력을 떨친
백련교(白蓮敎)에 속한 대도회의 한 분파로 의화권이라는 비밀 결사 단체가 주된 세력이었다. 이들은 산둥성 부근에서 우슈를 가르치면서 사람들에게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는 신비주의 사상을 주입시켜 서양 에서 들어온 기독교 사상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였다.
발생 배경
1840~1842년 아편 무역을 둘러싼 문제로 영국과 벌인
아편 전쟁(阿片戰爭)에서 패한 청나라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게 되었고,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였다(1842. 8). 그러나 그 동안 광저우 지방에서 영국군의 압제에 분노한 농민 수만이 무기를 가지고 영국군을 포위하는 등, 민중의 자발적인 침략 반대 투쟁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 등으로 청나라는 영토의 일부뿐만 아니라, 주권의 일부마저 제한되었다. 프랑스· 미국도 영국과 같이 무력을 앞세워 불평등 조약을 맺고 청나라를 반식민지화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전쟁의 패배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의 지불과 아편 거래의 합법화로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고, 게다가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로 봉건 사회의 기틀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 뒤 이런 혼란기를 틈타
홍수전(洪秀全)과 농민 반란군에 의한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1864) 운동이 일어났으나 정부군의 진압으로 실패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른바
양무 운동(洋務運動)이 시작되었다.
군사 중심의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관료들에 의해서 일어난 이 운동은 군사 공업을 일으켰고, 정부와 상인들이 연합하여 사업을 하는 등, 한층 청나라의 지배 체제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군사 중심의 근대화에만 치중하였기 때문에 근대화는 등한시되었고, 이어 벌어진 프랑스ㆍ일본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패하자 유명 무실하여 신진파 관리들은 무기· 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 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 체제· 교육 제도 개혁으로서 부국 강병을 실현해야만 청나라가 발전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헌법과 국회를 새로 만들고 교육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편하며, 산업을 보호·육성하는 것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고,
캉 유웨이(康有爲),
량 치차오(梁啓超) 등이 중심이 되어
변법 자강 운동(變法自彊運動)을 일으켰으나
서 태후를 비롯한 수구파의 쿠데타로 실패하였고,
캉 유웨이와
량 치차오는 망명하였다.
이러한 청나라 후기의 혼란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략을 야기시켰고, 이로 인하여 값싼 외국 상품이 밀려들어 왔으며, 그 속에서 경쟁력을 잃은 청나라의 산업은 도산하여 백성들의 경제 생활은 피폐하여졌다. 이러한 속에서도 특권을 지닌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 배외적인 기운이 높아갔다.
경과
청나라 말기의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에 겹쳐 홍수와 가뭄을 비롯한 천재지변이 일어나 유랑민들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유랑민들과 파산한 많은 농민들, 도시 지역의 빈민과 실업자들이 대거 합류하여 의화권의 세력이 날로 커졌다.
서 태후를 비롯한 보수파가 세력을 잡자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을 완화하고 그 목표를 외국 세력을 물리치는 데 두었다. 또한, 정권을 잡은 수구파도 이들을 완전히 진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이들을 이용해서 열강이나 양무파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에 정부는 의화권을 의화단으로 부르며 반합법화하였다. 그러자 의화단도 청나라를 받들고 외국 세력을 몰아 낸다는 '부청 멸양(扶淸滅洋)'을 기치로 내세우고 그들의 주요 투쟁 목적으로 삼았다. 게다가 크리스트교 를 믿는 신자가 된 사람들은 중국 고유의 전통을 무시하였고, 선교사들은 관리들을 협박하여 하층민 출신이 대부분인 신도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하였다. 그러자 의화단원들이 서양인들과 크리스트교 신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의화단 단원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신도들의 집을 불태우고 그들을 살해하는 등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1899년 말에 신진 세력인 양무파의
위안 스카이(袁世凱)가 산둥성의 관리로 오면서 의화단을 탄압하자 이들은 산둥성을 떠나 허베이성 일대로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순식간에 허베이 지역을 포함하여, 동북 지방· 몽골·쓰촨성 지방으로 세력을 확산하여 서양인들과 교회를 습격하고 그들이 세운 철도와 전신망을 부수고, 외국에서 들여온 상품들을 불태웠다.
그러자 영국· 독일· 프랑스·미국 등은 청나라 정부가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는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성명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세력이 날로 커진 의화단은 1900년에 텐진을 점령하였고, 이에 청나라 정부도 수구파의 지도 아래 의화단을 이용하여 같은 해 6월에 서구 열강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수도인 베이징에까지 세력을 떨친 의화단은 정부군과 함께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공사관 을 공격하였는데, 베이징이나 텐진에서의 의화단 세력이 절정에 다다랐다.
이에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을 비롯한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일본 등 8개국은 연합군을 조직하였고, 2,000여 명의 군대를 베이징으로 파견하였다. 청나라 정부도 이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외국 연합군을 물리쳤다. 그러자 연합군은 다구 포대를 점령하여 베이징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자 서 태후는 모든 외국인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베이징은 아수라장으로 변하여 살아 남은 외국인과 크리스트교 신도들은 점령당하지 않은 공관으로 피난하였다. 외국의 연합군들은 우수한 화력을 앞세우며 텐진을 점령하였고, 8월 14에는 베이징에 진격하여 관군과 의화단을 물리치고 55일 동안 갇혀 있던 자국민들과 신도 들을 구출하였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 태후와
광서제(光緖帝)는 시안으로 도망하고 몇몇 대신들이 남아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양무파는 연합군과 함께 의화단 잔당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의화단들은 베이징에서 후퇴하여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 저항을 계속하였다.
의의
1900년 10월부터
이홍장을 전권 대사로 한 대표단이 강화를 벌였다. 협상은 1년 가까이 진행되어, 1901년 9월 7일 의화단 사건 처리를 위한 영국·미국· 프랑스· 독일 등 11개국과의 협상이 끝나
베이징 의정서〔北京議定書〕가 교환되고, 이에
신축 조약(辛丑條約)이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서 청나라는 독일·일본 등에 이번 사건에 대하여 사죄하는 뜻으로 사신을 파견하는 것과 외척 배제 운동의 금지, 세금을 담보로 단비 배상금(團匪賠償金) 4억 5,000만 냥의 지불, 베이징 에 공사관(公使館) 구역 설정, 외국군 주둔 허용 등 불평등한 내용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외국 배척 세력인 보수파가 그 기반을 완전히 잃었고, 서구 열강에 의해 급속히 식민지화하였으며,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