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1 ~ 157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운경이며, 호는 호음이다. 부사 광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영의정 광필의 조카이기도 하다.
1509년에 생원을 거쳐 같은 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1514년에 유능한 젊은 벼슬아치를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 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인 사가 독서하여, 1516년에는 황해도 도사로서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고 그 뒤 사간이 되었다.
1523년에는 부제학을 지냈으며, 1534년에는 해마다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인 동지사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42년에는 벼슬이 올라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1544년에는 공조 판서가 되어 다시 동지사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554년에는 대제학에 올랐으나, 1558년에 과거 시험 문제를 사전에 응시자인 신사헌에게 유출시킨 죄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곧 다시 관직을 받아 같은 해에 중추부 판사가 되었고, 이어서 공조 판서가 되었다. 1562년 공조 판서에서 중추부 판사로 임지를 옮겼으나, 이듬해인
1563년에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려던 이량의 일당으로 몰려 죄인이 되는 바람에 그들과 함께 벼슬과 품계를 빼앗겼다.
그는 시문에 뛰어났는데, 시어를 자세하고 꼼꼼하게 다듬어 웅대하면서도 기이한 문구를 잘 만들어 내었다. 또한, 음률에도 능해서 칠언 율시를 특히 잘지었는데, 당시의 문단에서는 그와
신광한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그는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글로써 중국 에 이름을 떨쳤고, 조선에 파견된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그들과 시를 주고 받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글씨도 잘 써서 매우 재주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나, 일부에서는 그를 욕심이 많고 포악하다고 하여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호음잡고》가 있고, 저서로는 중국에 다녀와서 썼다는 《조천일록》이 있으며, 글씨로는 《이둔촌집비》가 경기도 광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