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51] 고려 시대의 문신. 본관은 영일이며 호는 형양으로
영일 정씨 형양공파의 시조이다.
과거에서 지방의 제1차 시험에 합격한 향공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부에 관리로 들어갔다. 1134년에는 배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일을 쉽게 하려고 홍주 소대현에 하천 파는 일을 추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135년에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수군을 지휘하여 순화현 남강에서 적을 막았다. 그 후 병선 판관이 되었고, 상장군 이녹천 등과 더불어 서적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1140년에는
최충·
김부식·
임원애·
최자 등과 함께 '
시폐 10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그는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가
김부식의 집에서 임시로 지내자 임금에게 간하는 관리로서의 체통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국자사업기거주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서 예부 시랑으로 임명되어 관직에 다시 나가게 되었다.
1146년에는 후에 예종이 된 태자에게 《서경》의 『대우모』를 강독하였다. 한편, 공예 왕후가 둘째 아들인 대령후 경을 태자로 세우려고 시도하였는데, 그는 그 음모를 저지함으로써 인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인종은 그가 임금에게 간하는 간관직을 오랫동안 역임하였다 하여 승선으로 임명하고 왕세자를 가르치는 일을 맡겼으며, 죽을 때는 그에게 의종을 잘 보좌하도록 유언하기도 하였다.
1148년에는 한림 학사가 되었고 이어 1149년에는 좌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시험으로 여러 인재를 선발하였다. 추밀원 주지사를 지냈으며, 인종이 죽을 때 유언으로 남긴 명을 받들어 거침없이 의종의 잘못을 간함으로써 왕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다. 또,
김존중·
정함 등으로부터 아무 잘못 없이 비방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가 몸에 병을 얻어 관직을 그만두었을 때
김존중이 그 직무를 대신 맡게 되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고 말았다.
글을 잘하여 유명하였는데 세상의 형편을 노래한 「
석죽화」를 비롯하여, 시 3편과 2편의 표전 즉, 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과 길하거나 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아뢰던 변려문의 글 2편이 《동문선》에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