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광종 때인
926년에
발해가
요나라에 의하여 멸망하자 그 유민 가운데 일부가 요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압록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세운 나라.
926년 1월 거란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발해는 무너지고, 그 곳에는
동단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는데 그 정부는 거란의 꼭두각시였다.
그런데 928년에 이 동단국이 통치 기구와 발해 유민을 이끌고 요동 지역으로 옮겨 가자, 옛 발해의 영토는 거란의 지배를 벗어 나게 되었고, 발해가 무너지면서 시작된 유민들의 저항 운동은 이 일 이후 더욱 활발해졌으며 또한 조직적으로 되었다. 이러한 저항 운동 세력 가운데 가장 체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활동하였던 이들이 대씨 정권이었는데, 이들은 압록강의 중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광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압록강 유역은 3면(북쪽·동쪽·남쪽)이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었을 뿐 아니라, 압록강이 바다와 연결되어 중국으로 통하므로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 공급이 유리한 장점도 있어서 이 곳을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 세력은 다른 저항 운동 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과 더불어 대씨가 옛 발해의 왕족이라는 것이 이 지역의 유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도움을 주어서, 이들의 정권은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었고 옛 발해의 남경 남해부 지역으로도 세력을 뻗쳤는데 이 정권을 기존의 발해와 구별하여 '후발해'라고 부른다.
후발해는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929년과 936년 사이에 중국 오대조의 후당에 발해라는 국명을 사용하여 몇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후발해와 오대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954년 7월에 발해국의 호족이었던 최오사 등 30여 명이 후주로 귀화하였다는 것 밖에 없으며, 그 뒤로는 후발해에 대한 대외적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970년에 압록강 지역의 발해 유민이 정안국의 국왕 열만화의 이름으로 중국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어느 시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후발해에 내분이 일어나 열씨 왕조가 대씨 왕조를 몰아 내고 새로운 국가를 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34년 7월에 발해국의 세자였던 대광현이 수만 명에 이르는 발해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고, 그 해 발해 왕실 사람인 대진림은 후당으로 망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938년에 발해 사람인 박승이 3,000여 호를 이끌고 역시 고려로 투항하였고, 954년에는 발해의 호족인 최오사다 등이 후주로 넘어갔다는 기록은 그러한 내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정안국의 열씨 정권은 970년경 여진의 사신을 중계로 하여 송나라와 국교를 맺었는데, 그 이후 대평흥국연간에 송나라의 태종은 정안국 과 협력하여 거란을 정벌하려는 생각으로 정안국과 친교를 맺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안국도 이에 호응하였으므로 두 나라는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신 왕래는 빈번하였지만 정작 거란에 대한 송과 정안국의 협공은 성사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송나라가 그 당시 중국 의 간쑤성 쪽을 침략해 오는 서하를 막는 데 골몰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안국이 송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과정에서, 정안국이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열씨가 아닌 국왕 오현명의 이름이 나타나 있고, 대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정안국에서는 다시 한번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시기가 언제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979년에 수만 명의 발해 사람이 고려로 투항하였던 기록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 무렵 오씨 정권이 약 40년간 정안국을 이끌던 열씨 정권을 몰아 내고 독자적인 국가 체제를 확립하여 송과 국교를 맺고 연호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거란에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두 나라의 중간 지역인 압록강 유역에 위치하는 정안국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거란은 983년 10월에 압록강의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어 이듬해에는 압록강 근처에 있던 여진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4월까지 계속하였다. 이 작전은 거란 원정군의 규모와 비교해 볼 때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고려의 북쪽 국경까지 거란의 세력이 다가옴으로써 고려에 위협을 주었으며, 압록강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 정안국의 본거지도 위태하게 되었다.
거란은 985년에 이 지역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반 년 만인
986년에 10만여 명에 이르는 정안국 사람을 포로로 잡고 20여 만 마리의 말을 빼앗아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그 후 그들은 그 곳에 4개의 주를 새로이 설치하고 직접적인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정안국은 무너졌으나, 《송사(宋史)》의 정안국전에서는 그 이후에도 정안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될 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989년에 동단국의 왕자가 여진인 사신을 통하여 필마를 송에 바쳤다는 기록, 991년에 동단국의 왕자 태원이 역시 여진인을 통하여 표를 올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문헌통고》에는 정안국의 왕자 태원이 대원으로 되어 있어서 후발해국을 세웠던 대씨 정권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아마도 원래의 정안국이 멸망한 다음 거란의 공격을 받지 않은 다른 지역에 있던 대씨 후손이 정안국의 이름을 빌려 썼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남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실제로 정안국은 986년에 무너졌고, 그로 인해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발해 부흥 운동도 끝이 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