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3 ~ 187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선지이고, 호는 경산이며, 시호는 문충이다.
1802년에 정시 문과 시험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 뒤 예문관 과 홍문관의 벼슬을 거쳐 이조 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평안도 지방에 괴질이 번져 10여 만 명이 죽는 등 민심이 크게 흉흉하게 되자 관서 위유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괴질의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이어서 강원도의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1831년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다. 1837년 예조 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다음 해에 헌종이 죽자 강화도에 사는 덕완군(나중의 철종)을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뒤 정치에서 물러났다가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다시 정치 일선에 나왔다.
임술 민란은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으로, 농민들이 일으킨 난이었다. 이 시기에 농민들은 가난에 쪼들리고, 더구나 흉년이 들면 각 지역에서는 굶주리거나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잇달아 나왔다. 이에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을 떠도는 유랑민이 되거나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 에 불만을 품은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작은 규모의 민란은 전국적으로 거의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임술민란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임술민란은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하여 전라도·경상도· 충청도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농민들은 죽창을 들고 일어나 관리를 쫓고 죽이고 불을 질렀다.
정원용은 이 소식을 듣고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정계에 나섰다. 그는 삼정 이정청의 총재관이 되어 난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그는 민란의 원인이 지방 관리인 수령과 이서들의 잘못과 나라에서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삼정 제도가 문란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삼정 제도를 본래대로 되돌릴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10월 삼정 이정책의 시행을 정지시키고 옛 제도로 되돌렸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이 되어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26일 동안 나라 일을 맡아 보았고, 고종이 왕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865년 비변사가 폐지되고 의정부가 모든 정치를 맡아 보게 된 후 의정부의 도상이 되었다.
세력 있는 가문의 출신으로, 20여 년 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지냈지만, 생활이 늘 검소하고 청렴 결백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경산집》 40권과 《황각장주》 21권, 《북정록》 10권, 《수향편》 3권, 《
문헌 촬요》 5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