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 ~ 1961] 판소리의 명창. 전라 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계이다. 어려서
정재근과
김찬업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정응민은 10대에 서울로 올라와서, 판소리 형식을 빌려서 꾸민 일종의 오페라와 같은 창극을 공연하는 단체인
협률사에 들어갔다. 협률사가 전국을 돌면서 공연할 때 그는 소리꾼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창극이 판소리의 예술 세계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고향인 보성의 도강재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소리를 가다듬고 있을 때, 그에게 소리 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그는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것은 판소리의 도(道)를 지켜 나가는 것이었고, 청중의 박수를 의식하는 태도를 꾸짖었다.
그는 정재근에게 소리를 배울 때 박유전의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를 이어 받았고, 김찬업에게는 전세종의 《춘향가》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자기만의 독특한 정응민제 판소리 양식을 개발하여 이 노래들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그는 좋은 목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노력을 하여 목을 얻었고 대명창이 되었다. 성대가 굳고 소리가 크지 못하여 극장 공연에는 적당하지 않았으나, 실내 공연에서는 대단한 솜씨가 발휘되어 청중을 감탄하게 하였다. 그는 보성 소리를 가꾸어 낸 소리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승인 정재근이 보성 소리의 기초를 닦고, 정응민은 이를 갈고 닦아 보성 소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소리제는 제자들을 통하여 1970년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정응민 의 소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소리가 훌륭하였기 때문도 있지만, 향촌에 묻혀 창극 소리의 해독을 입지 않은 전통 판소리를 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판소리 의 소리꾼이 청중만을 의식하는 세태를 비판하고, 판소리 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그는 판소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단가 《녹음방초》와 《수궁가》 중 《악성가》가 개인 녹음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