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2~163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진이고, 호는 수죽이다. 왕과 인척 관계에 있는 가문 출신이다. 1579년 식년 문과 시험에 을과로 합격하여 독서당에 들어갔다. 그 뒤 선조 때 이조 좌랑이 되었고,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의 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92년 일본이 조선 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왕을 모셨다. 선조 때부터 조정의 정치는 붕당 정치로 이루어졌다. 붕당 정치는 정치적인 의견이 같은 사람끼리 만든 당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이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당이 여러 번 나누어졌다. 처음에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졌는데, 중앙 정치에 처음으로 나온 관료들을 동인이라 하였고, 기성 관료는 서인이라 하였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입장에 따라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들은 남인· 서인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들은 북인이라 하였다. 이 중에서 북인 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세력이 강해져서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정창연은 북인 정권에 참여하였다. 1609년 그는 이조 판서 가 되었는데, 추천되는 과정에서 왕비 유씨의 친척이라고 하여 비판을 받았다. 한편, 북인은 왕위를 잇는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대북파와 소북파로 갈라졌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을 왕으로 세우려던 파를 대북파라고 하였고, 영창 대군을 왕으로 세우려던 파를 소북파라 하였다. 대북파에는 정인홍· 이이첨이 있었고, 소북파에는 유영경이 있었다. 정창연은 정인홍· 이이첨 등의 대북파를 지지하였다. 그는 1614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어서 좌의정이 되었다. 이 때 계축옥사로 영창 대군이 강화도에 귀양을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강화 부사 정항에 의해 무참하게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들은 부사직 정온이 상소를 올려 "정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정창연 은 이원익과 함께 상소를 올려 정온을 구해 주었다. 이어 인목 대비를 자리에서 몰아 내려 하자 벼슬을 버렸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 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우는 인조 반정이 일어난 뒤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는 그의 조카로, 옥사가 일어날 때마다 억울하게 걸려든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최유원은 "남에게 덕을 입히고도 그 사람에게 알리고자 않는 이는 오직 공뿐" 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