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5 ~ 1330] 고려 시대의 문신. 본관은 전주이다. 자는 순부이며, 호는 송파이다. 시호는 문간이다. 처음의 이름은 최부였으며, 그 후 최당·최수·최실· 최성지로 여러 번 이름을 바꾸었다. 최성지의 아버지는 정2품 벼슬인 찬성사를 지낸
최비일이다.
최성지는 고려의 제25대 임금인 충렬왕 때 20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계림 관기를 거쳐 사한을 지냈다. 그 후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당시 권력을 잡고 있는 이들이 충선왕을 시기하여 그에게 임금을 따라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충선왕이 무종을 옹립할 때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지감찰사사가 되었다.
1308년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고려의 제26대 임금 자리에 오른 뒤, 최성지는 동지밀직사사· 대사헌·첨의평리를 거쳐 정2품 벼슬인 찬성사에 올랐고, 추성양절공신· 광양군에 봉하여졌다.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오랫동안 귀국하지 않았을 때는 뇌물을 받고 관리를 뽑아 쓰다가 그 죄로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곧 풀려났다.
1320년(충숙왕 7)
충선왕이 토번으로 귀양을 갔을 때는 충선왕을 시종하지 않고 몸을 피하여 나타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1321년과 1322년 두 차례에 걸쳐 오잠·유청신 등 일부 고려인들이 고려에 행성을 두어 고려를 원나라의 땅으로 만들려고 할 때에는,
김정미·
이제현 등과 함께 원나라에 글을 올려 그 논의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1324년 정3품 벼슬인 삼사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물러나 한적한 생활을 하였다.
최성지는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원나라에 있을 때는 충선왕의 명으로
수시력을 배워 와 고려에 전하였다. 수시력은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왕순 등이 만든 역법 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1281년(충렬왕 7)에 반포하여 1370년(공민왕 19)까지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