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은 제3차 슐레지엔 전쟁이라고도 하며, 세계적으로 볼 때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프랑스 양국의 오랜 싸움의 일환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때에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탈환을 기도하여 군비증강에 주력함과 동시에 200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제휴하고 다시 러시아·스웨덴 ·작센 기타 독일의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포위할 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영국과 결탁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6년 8월 기선을 제압하여 작센에 침입함으로써 전쟁이 터졌다. 프로이센은 서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얼마 후 우세한 적군의 반격을 받아 점차 병력이 소모되어 수세에 몰렸으나, 러시아에서
표트르 3세가 즉위하고부터는 형세가 일변하여, 1763년 2월 15일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이 성립되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를 확인받게 되었다.
또한 7년 전쟁을 치루고 있던 영국은 대 피트(Pitt the Elder)가 총리가 된 후 유럽에서의 전쟁은 프로이센에게 맡기고, 식민지에서 전쟁에 전념하였고 전황은 역전되었다. 영국군은 1760년 캐나다에 침입하여 퀘벡을 공략하였다.
1763년 2월 10일 7년전쟁의 결과로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가 체결한 조약. 이로 인해 프랑스는 캐나다와 미시시피강(江) 이동(以東)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게 할양하여 북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영토를 잃었다. 또한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얻었고, 에스파냐는 그 대신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강 이서(以西)의 루이지애나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샹데르나고르 등의 무역 거점을 제외한 일체의 식민지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7년 전쟁은 유럽의 판도와 아메리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18세기의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763년 파리조약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이 영국쪽으로 기울어지자 유럽 전체에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조장되었다. 프랑스는 이에 대해 영국과 아메리카식민지간의 분리를 조장했고, 나중에 미국의 독립혁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영국정부는 7년 전쟁으로 야기된 재정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통치강화와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개입정책을 실시하였고, 이것은 독립혁명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