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의 청소년 수양 단체. 국선도(國仙徒), 또는 풍류도(風流徒) 라고도 한다.
기원
원래 씨족 공동체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된 것인데, 신라의 국가 조직이 커지면서 그것에 맞추어 새로운 사회에서 요청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재편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처음에 미녀를 뽑아
원화라 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었으나, 원화가 서로 질투하므로 여자 대신에 남자 중심으로 바꾸었다.
그 뒤
576년(진흥왕 37년)에는 화랑도가 국가의 공적인 기구로 발전하였다.
조직과 성격
화랑도의 총지도자로서 국선 1명을 두고, 그 아래에 15~16세의 귀족 자제들로 이루어진 여러 명의 화랑이 있었으며, 각 화랑은 다시 수천 명에 이르는 낭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느 때는 유명한 산과 큰 강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몸과 마음을 닦고 시가와 음악을 즐기는 한편, 무술을 익혀 단결의 정신과 강인한 체력을 길렀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터에 나아가 목숨을 바쳐 싸웠다.
따라서 화랑도는 나라의 인재를 기르기 위한 교육 단체이며 일종의 전사단이었고, 나아가서는 사교 단체나 종교 단체의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화랑 정신
화랑 정신은 재래의 공동 사회의 이념 위에 새로운 유교 · 불교 정신을 더한 것이었는데, 진평왕 때 원광 법사가 귀산·추항의 두 화랑에게 가르친 ‘세속 오계(世俗五戒)’가 화랑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세속 오계는 유(儒)·불(佛)·선(仙)의 정신 세계에다 당시 신라가 당면한 삼국 통일이라는 현실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그에 따라 화랑도 중에서 훌륭한 충신과 장군들이 많이 나오게 되어, 신라는 마침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변천
화랑도는
진흥왕 때 이후
문무왕 때에 이르기까지 크게 융성하여 통일기의 어려운 시기에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통일 후 평화가 계속되면서 차차 쇠퇴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신라가 망한 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 정신·애국 정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4선(四仙) - 효소왕 때의
득오곡(得烏谷), 경덕왕 때의
월명사(月明師)·
충담사(忠談師), 경문왕 때의
요원랑(遼元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