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 ~ 1580]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나식(羅湜), 이여(李畬),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언적을 사숙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한 뒤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명종 때 관직에 올랐으며 동서 분당 때는 동인에 가담하였다.
문과급제 후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掌令) 때 재물을 탐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 1560년 대사성,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었다.
1562년 경연관 재직 중 윤근수·구수담(具壽聃)·허자 등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다시 파직당했고 1563년초 복직되고 곧이어 삼척부사로 부임하였으나, 과격한 발언 때문에 문제가 되어 다시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하여 1568년(선조 1)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에 올라 향약(鄕約)의 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동인에 가담했다. 이후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청렴결백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나 재물 문제로 탄핵을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