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7 ~ 18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중(汝中), 호는 심재(心齋).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종제(宗悌)의 현손으로, 판서 유령(有寧)의 아들이다.
1774년(영조 50) 생원시에 합격, 이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783년(정조 7)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이 되었다.
179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경기도관찰사·규장각직제학, 이조·형조의 참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대사헌 등을 지내고, 1799년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그뒤 이조판서·좌부빈객(左副賓客)·대사헌·의정부우참찬·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등을 지내고, 1800년 순조가 즉위하던 해 우의정, 1802년(순조 2) 좌의정이 되었으며, 1804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05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온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있다가, 14년 뒤인 181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신임이 두터워 항상 측근에서 정사를 보좌하였고 민심수습에 공로가 컸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人物志. 〈洪淳晩〉
정약용과의 악연.
철저하게 당파에 휩쓸려 자기만을 아는 이기주의자였으며, 철저하게 훈련된 기회주의자이기도 했고, 극치의 아부로 영의정까지 오른 대표적인 가렴주구(苛斂誅求)의 관리.
※참고사항
서용보(1774 생원시 및 증광문과)는 서영보(1759-1816)의 집안으로 다산 정약용(1762-1836:1783진사, 1789알성시)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1794) 경기감찰사였던 서용보의 비행을 고발한 것이 18년의 긴 유배 생활의 불운을 만들었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에 자신의 비행을 지적받았던 서용보는 뒤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다산을 끝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역할을 한다. 다산의 생애가 저토록 불행했던 것은 바로 이 서용보와의 악연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1801년 다산이 신유옥사(辛酉獄事)로 구속되고 국문을 맡아 비참한 불행을 겪던 때에, 재판 결과 큰 잘못이 없다고 판명되어 재판관계자 모두가 그를 석방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당시 우의정이라는 고관으로 위관(재판관)의 한 사람이었던 서용보의 반대로 석방될 기회를 놓치고 먼먼 귀양길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귀양살이를 시작한 때로부터 오래지 않은 1803년 왕실의 최고 어른 정순대비가 다산을 유배지에서 풀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정승이던 서용보가 다시 가로막아 풀려나지 못했다. 때문에 다산은 18년의 긴긴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으며, 57세이던 1818년 가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귀양살이를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다.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 겨울에 조정의 의논으로 다산을 다시 등용하여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결론이 났으나 영의정인 서용보가 또 저지해 출사할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