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 이재곤(李載崑)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이재곤 (李載崑)
[1859 ~ 1943]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정미칠적의 한 사람이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독립운동가인 이관용은 그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이재곤 (李載崑) 정미7적 을사 5적 경술국적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송병준 이윤용 이토 히로부미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임선준 이호준 이항구 권태환 아관 파천 을사늑약 한·일 신협약 경술국치
▣ 백과사전
[1859 ~ 1943]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정미칠적의 한 사람이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독립운동가인 이관용은 그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로, 고종과는 같은 항렬의 왕실 종친이다. 흥완군 이정응에게 입적된 완순군 이재완의 친동생이다.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신응(李愼應)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벼슬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와 지방의 현감 등을 거쳤다.
 
1896년 비서원경, 1898년 종정원경, 1902년 회계원경 등을 지내며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때는 학부대신으로서 공을 세웠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았다.
 
이후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자통일회, 국민연설회 등의 각종 친일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살해되었을 때는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한자통일회이등박문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도 임명되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후에는 불교계와 왕실을 중심으로 꾸준한 친일 활동을 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조직된 불교 종단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으며,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고문도 역임했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 축하를 위한 행사가 경성신사에서 열렸을 때 참석했고, 1917년 순종이 일본 황실 참배를 갈 때 수행했다.
 
3·1 운동 때 권중현과 함께 작위를 반납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일본 정부로부터 거절당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광나루에 별장을 갖고 있을 만큼 호화롭게 살았고, 1960년 보도에 따르면 자손들도 서울 중구 세종로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고영희 (2) 백과 송병준 (2) 백과 이병무 (2) 백과 이완용 (2) 백과 임선준 (2) 백과 조중응 (2) 백과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기본항목(E)
내서재 추천 : 0
▣ 카달로그 작업
관련 의견 모두 보기
자유 의견
▶ 지식지도
▷ 원문/전문 (없음)
▷ 시민 참여 콘텐츠 (없음)
▷ 관련 동영상 (없음)
▣ 참조정보
백과 참조
정미 7적의 1인.
목록 참조
외부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