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 ~ 1931]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다. 본관은 양주이다.
이완용에게는 처남이 된다.
1885년 경과증광별시(慶科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한 뒤 평안남도관찰사, 평안북도관찰사(1899년)와 주불공사(1901년), 주미공사, 주일공사(1904년)를 지냈다. 1907년 평리원 재판장에 임명되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처리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조약 당시에는 고종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승녕부총관을 맡고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에 세운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16년 중추원 고문에, 1921년 중추원 개편 때는 참의로 임명되었다.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은사금을 받았으나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해 빚에 쫓기다 파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