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 ~ 1504] 조선 시대 전기(성종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탐진이며, 1454년에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최부는 1477년에 진사 시험을 통과했고,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장소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는 수세기동안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배운 오경을 공부했지만, 주자의 사서의 중요성 또한 배웠다. 이것은 13세기 중반에 중국 교육의 주류에서 성리학의 학설을 처음으로 수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1482년의 첫 번째 과거 시험과 1486년의 두 번째 과거시험을 통과하였고, 정부는 그에게 즉각 벼슬을 주었다.언론, 감찰, 교육 등을 담당하는 홍문관에서 홍문관교리로 일한 것을 비롯하여 그는 다양한 관직을 수행하였고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1488년 2월부터 7월 까지 명나라를 여행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서 유명하다.
연산군 4년(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에 단천으로 귀양 갔다가 6년 뒤 연산군 10년(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사형당하였다.
중종 치세인 1506년에 사후복권되었다.
최부가 중국을 여행하고 남긴 일기는 16세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널리 출판되었다. 현대 역사가들 또한 그의 기록을 활용하는데, 이것은 그의 여행 일기가 15세기 중국 문화를 외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유일한 기록이며 중국의 도시들과 지방 마다 드러나는 차이점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에 드러난 입장과 태도는 15세기 조선 지식인의 유교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는 중국 문화가 조선의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국의 도시, 사람, 관습, 요리, 대운하를 통한 상업적 교류에 대한 그의 설명은 15세기에 중국인의 일상 생활과 중국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차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준다.